|
렘2:4-13/ 생수의 근원 / 한경직 목사 2014-08-26 15:11:32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13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준엄한 책망의 말씀이올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황막한 광야 길을 거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여러 가지 사신 우상을 만들어 섬긴 까닭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읽은 요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하나는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일이요, 다른 하나는 물을 저축하지도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전인류를 향하여서도 하시는 말씀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두셨으며, 온갖 축복을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명령에 순종치 않았으며 죄를 지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인간은 그들의 영적 기갈을 멈출까 하여 여러 가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인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두 가지 악을 행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 대신 웅덩이를 팠는데 이 웅덩이는 물을 저축할 수도 없는 깨어진 웅덩이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교훈을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생수의 근원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십시다. 여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솟아나는 샘물에 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거저 주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도 거저 주셨습니다. 산천초목과 오곡백과도 거저 주셨습니다. 공기도 거저 주셨고, 물도 거저 주셨고, 육체를 가진 인간이 이 자연계에서 살 만하게 모든 것을 거저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죄지은 인간을 돌이켜서 다시 그 영혼이 살기 위하여 모든 은혜도 거저 주셨습니다. 선지자들도 거저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까지 거저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기가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속하시고 모든 인류에게 사죄의 길도 거저 열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심령을 소생케 하기 위하여 성령을 또한 충만히 거저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주신 이 모든 은혜는 생수와 같습니다.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제주도를 가보시면 이곳저곳에서, 그리고 민물이 나가면 바다 밑 속에서도 솟아나는 우물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성지에도 곳곳에 이러한 솟아나는 샘물을 봅니다. 여리고는 매우 메마른 반 사막지대에 있으나, ‘엘리사의 우물’이라고 하는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서 그 성이 생겼고, 종려나무 가지가 늘어진 거리를 볼 수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 같은 데도 이런 샘물이 종종 있어서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안식과 새 힘을 줍니다. 이것을 오아시스라고 부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신 은혜를 이러한 솟아나는 샘물에 비유하였던가?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하자면 그저 샘솟듯 솟습니다. 그저 자발적으로 솟아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이 스스로 넘쳐흐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 사랑과 은혜는 다함이 없습니다. 넘쳐흐릅니다. 풍부합니다. 영원히 마르지 아니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주에 사무칩니다. 하늘에도 충만하고 땅에도 충만합니다. 산천초목도 그 은혜로 자라갑니다. 산해어별(山海魚鼈)도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갑니다. 전인류도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는 수정같이 맑고 깨끗합니다. 무슨 섞인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베푸는 은혜에는 때때로 불순한 것이 섞입니다. 인간이 주는 선물에는 불순한 동기가 잠재(潛在)하기도 합니다. 사실 불순한 사랑이 있고, 불순한 원조가 있고, 불순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는 불순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푸른 하늘과 같이 맑고 깨끗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솟아나는 샘물같이 차고 시원합니다. 기갈한 심령에게 참 만족을 줍니다. 피곤한 길손에게 새 원기를 줍니다. 새 힘을 줍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의 말씀과 같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새 생명을 줍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고 또 죽어 메마른 백골에게도 새 생명을 주어 일어나게 합니다. 일어날 뿐 아니라, 강한 하나님의 군대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 샘이 흐르는 곳에 나무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만민에게 생명을 주시는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파는 웅덩이들은 어떠합니까?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웅덩이를 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판 웅덩이들은 또한 터져서 물을 저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대로 성지는 메마른 곳입니다. 한국처럼 비가 자주 오는 곳은 아닙니다. 이따금 비가 오는데 그 물을 받아 모으기 위해서 웅덩이를 팝니다. 이따금 웅덩이에 빗물이 모입니다. 그러나 이 물은 여러분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깨끗하지 못합니다. 대체로 흙탕물입니다. 지면에 있는 먼지와 온갖 더러운 것들이 섞인 불결한 물입니다. 사실 이 고인 물은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물은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뜨거운 햇볕에 곧 증발되기도 하고 때로는 웅덩이 밑이 터지게 되면 다 새어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솟아나는 샘물을 버리고 이런 웅덩이를 팠다고 하였습니다. 또 터진 웅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깊은 속에는 영적 기갈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 중 하나입니다. 짐승들은 그 육체의 본능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하지 아니합니다. 육을 근거로 하는 인간의 본능을 모두 채운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 심령의 깊은 속에 잠재한 영적 기갈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기갈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멈출 수 있는 기갈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들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대신에 여러 가지 우상을 만들며 거기에 절하여 거기에서 영적 기갈을 멈추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터진 웅덩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심령을 만족케 할 만한 생수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기갈이 심하여지며 그 심령을 괴롭히는 것뿐입니다. 이제 인간이 파놓는 웅덩이들을 몇 가지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의 손으로 여러 가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기도 했고, 또 바알이나 아스다롯 같은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것들을 숭배하기도 하였고, 혹은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몰록 같은 우상 앞에 가서 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옛날 사람들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소위 문명화하였다고 하는 현대인들 가운데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누른 칠을 하여 놓은 우상들 앞에 가서 꼬박꼬박 절하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울에도 많습니다. 여자들도 많습니다. 남자들도 있습니다. 소위 인텔리들도 있습니다. 소위 실업가들도 있습니다. 다만 나뭇조각인 우상이 무슨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영혼 깊은 속에 잠재한 영적기갈에 무슨 만족을 주겠습니까? 웅덩이들을 파는 이들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더러운 물을 마셔 보려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엄히 명하신 십계명 중에 제 2계명을 분명히 들으세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진노하는 신이니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고 나를 사랑하며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수천 대에 이르게 하리라” 우상 숭배를 멀리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자 그대로의 우상 외에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우상들이 또한 많습니다. 그 하나는 향락의 혹은 정욕의 우상입니다. 무엇이나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고 그것을 좇을 때에는 그것이 곧 그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정욕의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청년들 사이에 많습니다. 옛날에는 정욕의 상징인 우상을 숭배하던 풍속도 있었습니다. 혹은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섬기던 ‘바카스’라는 우상도 있었습니다. 오늘에도 이 정욕의 우상, 이 향락의 우상을 섬기다가 망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영화배우, TV 탤런트만 따라다니며 엽색 행각을 일삼다가 외화 유출, 각종 범죄로 구속된 모 사장의 아들 사건이며, 가정을 가진 어떤 남자가 어떤 다방 마담에게 미쳐서 비밀 동거생활을 하다가 오히려 그 여자의 칼에 찔려 죽은 사건 등등, 이 정욕의 구덩이를 파다가 결국은 멸망을 당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습니까? 기억하세요. 인간의 심령은 이 정욕의 웅덩이 물로 참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기억하세요? 이 탕자가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허랑방탕하며 온갖 정욕의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남의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가 치는 돼지들은 팥 껍질에 만족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같은 팥 껍질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 그는 돼지가 아니요, 인간이었던 까닭입니다. 인간은 이 정욕의 웅덩이 물에서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물을 계속하여 먹다간 결국은 육신과 영혼이 같이 망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 금전, 부, 혹은 탐욕의 우상을 섬깁니다. 성경은 탐심이 곧 우상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는 이들이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일상생활의 물질이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 대신 그것을 사랑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서는 아니됩니다. 그것을 온갖 노력의 최고 목표로 삼아서도 아니됩니다. 현재 한국 실정에 있어서 기업을 일으키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국력을 증강하여야 하며 일반국민의 생활의 향상과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부실 기업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업 자체는 망치면서도 자기 집에는 많은 달러를 감추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요사이 재벌의 반사회성이란 말을 종종 듣습니다. 내 돈이니 내 멋대로 쓴다는, 몰상식한 반윤리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기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사명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물질을 많이 축적하는 데 인간의 참 만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바로 쓸 때에 나도 옳게 살고 온 국민이 같이 잘 살 수 있습니다. 사실 물질도 쌓아 놓고 보면 결국은 환멸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코닥(Kodak) 회사 주인이었던, 수백이 아닌 수억 장자인 이스트만(Eastman)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살사건이 아직도 우리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부도 결국은 깨어진 웅덩입니다. 그 물을 먹고 우리 심령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허영의 우상을 섬깁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 곧 지위,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우상으로 삼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무솔리니가 그러했고, 히틀러가 그러했고, 스탈린이 그러했고, 모택동과 김일성이 또한 그러합니다. 또 작은 무솔리니, 작은 히틀러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상당히 있습니다. 이들의 말로(末路)가 대체로 어떻게 끝나는 것도 우리가 보았고, 또 장차도 볼 것입니다. 일세의 영웅 나폴레옹이 결국은 다 패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만 유배되어 멀리 지중해 물결을 바라보면서 탄식한 말을 우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나는 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써 온 인류를 정복하셨다.” 세상의 영광에 참 행복이 없습니다. 인간 심령의 깊은 기갈은 이런 헛된 영광으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깨어진 웅덩입니다. 여기서 생명수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떠나 웅덩이를 파지 마십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문자 그대로의 우상, 정욕의 우상, 물질의 우상, 허영의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마십시다. 이것들은 다 깨어진 웅덩이들입니다. 이 물을 마시지 마십시다. 뜨거운 여름에 산에 가는 것도 좋고 바다에 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이 솟아나는 샘물을 찾지 못하면 참 행복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4절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장 38절의 말씀입니다. 솟아나는 샘물이 되신 예수님께 나와 마시세요. 우리의 기갈한 심령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는 며칠이 안 되어 또다시 8?15를 맞게 됩니다. 금년이 바로 해방 30년이올시다. 30년이면 한 세대입니다. 이러한 뜻 깊은 해에, 나의 과거 30년간의 생활을 잠깐 회고하는 것도 좋을 줄 압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수의 근원에서 흠뻑 마시면서 새 힘을 얻어 교회를 봉사하며, 복음을 전파하며, 따라서 새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였는가, 혹은 터진 웅덩이나 팠는가? 미신의 웅덩이, 정욕의 웅덩이, 탐욕의 웅덩이, 허영의 웅덩이 등등. 여러분, 과거는 이미 역사에 속합니다. 과거는 과거로 장사하고, 우리는 앞날을 옳게 맞아야 합니다. 이 시간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께 돌아와서 생명수를 흡족히 마시고, 5천만을 복음화하여 만세반석 위에 통일된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오늘 아침 우리 하나하나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흡족히 그 심령을 채워 주시옵소서. 생수의 근원 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