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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9:9-13/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한경직 목사 2014-08-26 15:01:50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마태복음 9장 13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이올시다. 오늘 읽은 성경은 주님께서 마태를 불러서 제자를 삼으신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바다 북편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다메섹과 애굽의 통로로 물자교류의 요충지대였습니다. 거기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그 세관에서 일하던 레위 혹은 마태라고 부르는 한 세리를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세무직원이 그렇게 칭찬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혹 있는 듯하지만, 그때에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사회에서 온전히 버림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흔히 세리와 죄인으로 불려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예속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 아래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더욱이 세리의 책임은 유대인에게서 돈을 착취하여 외국인에게 바치는 일이므로 세리들은 요샛말로 민족 반역자 또는 매국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세제(稅制)는 극히 부패하여 토색이 많아서 세리들은 모두 부정부패의 비양심적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리들 가운데서 하나를 불러서 구원하셨을 뿐더러, 그로 제자를 삼은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읽은 기록은 매우 간단해서 자세한 형편은 알 수 없으나 아마 주님께서 이날 마태를 첫 번 만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상당한 기간 동안 가버나움에서 일하셨으므로 아마 마태도 많은 무리 가운데 섞이어서 멀리서 주님의 교훈을 들었을 줄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이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이었으나 그의 가슴 속 한 구석에는 양심의 한 조각이 남아 있었으며, 은근히 옳은 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마태가 세관에 앉아서 자기 사무를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쓴 이 마태복음에는 이런 말이 없지만, 누가가 쓴 기록에는 그 말을 듣고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천대받는 직업이었지만 안전한 수입이 있는 자리를 떠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의 과단성과 결단을 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므로 그가 중심으로 원하던 양심생활을 할 수 있었을 뿐더러,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되어 천국의 한 기둥이 되었고, 돈만 다루고, 금전 출납만 적던 그의 붓으로 주님의 말씀을 적어서 마태복음을 저술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이 마태의 부름을 생각할 때에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법입니다. 인간은 사람의 외면을 보나 주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십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보나 우리 주님은 그 미래를 보십니다. 인간은 그 현실과 밖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나 주님은 그 미래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그래서 세리 마태에게서 장래의 그의 제자를 보셨고, 그를 핍박하던 사울에게서도 장래의 위대한 사도 바울을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마태는 아마 감사해서 주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하루 저녁은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같이 청함을 받은 친구들은 물론 그의 동무들인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제자들에게 조용히 와서 하는 말이, “너희 선생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러면서 힐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자기를 의원, 지금 말로 말하면 의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많은 병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뜻은 육체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도 심령의 병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은 죄를 하나의 질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죄는 큰 심령의 병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유전병입니다. 왜? 아담 때부터 유전하여 내려오는 병입니다. 이 병은 또한 전염병입니다. 죄도 사면으로 퍼집니다. 이 병은 사실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파멸시키는 암과 같은, 인간의 견지에서는 불치의 병입니다. 죄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병이요,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자동차가 그 기계 속에 고장이 생기면 자연히 사고를 일으킵니다. 인간들도 그 깊은 심령 속에 이 큰 병 때문에 온갖 사고와 범죄와 소위 사회악과 혹은 구조악 등 갖은 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결과만 다스릴 수 있는 법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번 귀를 스쳐지나가는 도덕적 훈화만으로도 물론 부족합니다. 인간 심령 깊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 큰 병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 병을 고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병은 주님만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만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인간의 가장 큰 병을 치료하는 오직 하나의 의사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또한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은 죄인을 앓는 환자로 보셨습니다. 모든 범죄자들을 그 속병을 앓는 환자로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을 만날 때에 그들을 미워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죄인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눈이십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어떻게 보는가? 각종 범죄자를 어떠한 눈초리로 보는가? 이 범죄자들을 사실 도우려고 하면, 먼저 이들을 환자로 보는 예수님의 눈이 필요합니다. 모든 죄인들을 이렇게 환자로 볼 때에 우리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눈으로 모두 보게 될 때에 우리나라의 경찰제도나 재판제도나 온갖 사법제도에도 큰 변혁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권면의 말씀을 우리도 꼭 들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우리도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물론 제사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과 온갖 의식과 제도와 그런 것들을 항상 소중하게 실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방면에만 치중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긍휼과 사랑을 잊어버리고, 사회의 불행한 계층을 오히려 멸시하는 독선주의와 외식에 빠졌습니다. 현대에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생활 주변에는 이러한 형식주의나 독선주의가 없는가? 사회의 온갖 불행한 이들을 중심으로 도우려는 마음보다도 그저 멀리하려는 바리새인의 태도는 없는가? 우리도 제사나 의식보다도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심정을 좀더 배워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주신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쓸데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적 의사이신데, 죄의 병이 하나도 없는 의인에게는 우리 주님도 쓸데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영어로 말하면 아이러니컬한 말입니다. 반어적인 표현이며,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좀 비꼬는 말씀입니다. 왜? 이 세상에는 사실 의인은 하나도 없는 까닭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범죄자입니다. 누구나 죄인입니다.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누구에게나 이 영적 의사가 꼭 필요합니다. 누구나 이 가장 큰 질병인 죄를 고쳐야 하고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예수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예수님께 나와 이 병의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해야 모든 다른 일들, 일상생활의 모든 책임도 바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대도 불구하고, 옛날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인 줄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의인인 체하였습니다. 이렇게 속에 중한 죄의 병을 지니고도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는 예수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병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약을 주며 무슨 치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사실은 중환자요 절망적인 환자들입니다. 만병의 의원인 예수님께서도 이런 환자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이들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에도 그 수가 적지 아니합니다. 교회 밖에도 많고, 교회 안에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스스로 옳다고 하는 마음, 자기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 남의 눈의 티는 볼 줄 알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어느 사회에나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위해서는 실로 천사들이 곡할 노릇입니다. 왜? 이러한 이들을 치료하여 줄 길은 도무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우리 주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실로 가련한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까? 우리가 과연 이 죄의 병을 고치기 원합니까?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까? 그러면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을 솔직히 살펴 내 죄를 깨달아 알고, 솔직하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불러서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치료하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도 피 흘리는 손을 들어 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이들을 구원하시려 오셨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모두 구원하여 주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으세요.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 사회에서 가장 죄인이라는 지목을 받던 이들을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태도를 오늘날 믿는 우리도 꼭 좀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죄인이라는 지목을 받는 이들을 만나려고 하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생각하여 보세요. 아마 경찰서에 가면 구치소, 서대문 혹은 안양의 교도소, 윤락 여성들이 모인 곳, 그리고 사방에 흩어져서 허둥지둥하는 전과자들입니다. 깊이 생각하세요.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 몸이올시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날까지 그 교회를 통해서 자기가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 하시던 일을 계속합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하면 이러한 곳에까지 따라야 할 것이 아닌가? 제가 아는 대로 경목들 가운데 특별히 구치소 전도를 힘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교역자들과 평신도들 가운데도 특별히 교도소 전도를 힘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윤락 여성들 사이에 특별히 전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교역자 가운데 김덕진 목사 같은 이는 그 일생을 이런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전과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 말은 제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러한 이들, 우리 사회 계층 가운데서 가장 죄인으로 지목을 받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헌신하며 일어나는 이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많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 일어난, 소위 김대두 사건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집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러한 흉악한 범죄에까지 이른 것인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여기 한 젊은이가 어떻게 실수해서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가서 형을 치르고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에게는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물론 친척까지, 때로는 자기 가족까지도 외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이 전과자들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흔히 자기들끼리 또 모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선 또 범죄할 것을 의논합니다. 그리하여 또 잡혀 들어갑니다. 형을 받습니다. 그다음에 또 나와서 또 전과자가 됩니다. 그다음에 또 갈 곳이 없습니다. 또 자기들끼리 모입니다. 또 죄짓습니다. 또 형을 받습니다. 또 전과자가 되어 나옵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그런 가운데 어떤 이는 아주 자포자기해서 어떠한 흉악한 범죄라도 감행하게끔 됩니다. 이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큰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이들을 선도하고 구호하고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큰 운동이 우리 한국 교계(敎界) 안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이들도 살리고 우리도 삽니다. 참으로 주를 따르려는 청년들, 주님께 헌신하는 교우들, 특별히 이런 방면으로 전적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많이 나와서 이 일터에 추수할 일꾼을 많이 보내달라고 우리 기도하십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발자취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기도합시다. 긍휼과 자비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죄인을 사랑하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보내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 시간 저희들의 신령한 눈을 열어서 아버지의 사명을 받고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큰 깨달음이 있는 이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아니하시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시려고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는 그 주님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따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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