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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1:1-11/ 종려주일의 예수 / 한경직 목사 2014-08-26 10:54:31 부활절 전 주일을 흔히 ‘종려주일’이라 하는 이름으로 지킵니다. 그 이유는 이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영접한 까닭입니다. 오늘 아침 성경에서 읽은 대로, 이 종려주일 주님의 행동은 그의 평소의 생활과는 다소 대조적입니다. 전에는 흔히 그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신 후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후에 무리가 억지로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할 때에 그는 그 자신을 숨겨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에 하신 주님의 태도는 그때와는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을 명하여 어느 촌에 가서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고, 또 그 위에 높이 올라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호위되어 호산나를 부르는 환영을 받으시면서 말하자면,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셨습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 전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시 자기의 조국 유대가 죄로 말미암아 장차 바벨론에게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여러 번 거듭하다가 마지막에는 큰 멍에를 자기 목에 메고 그 손에는 큰 밧줄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장차 유대가 이렇게 바벨론의 멍에를 메고 그 줄에 메임을 당하리라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는 그의 이러한 극적인 행동을 통하여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좀더 분명하게 전달한 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이 종려주일 자기의 행동을 통하여 곧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도 인용이 되었지만, 구약 스가랴 9장 9절에는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여러분, 종려주일에는 이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평화의 왕으로서 임하신 것입니다. 또 온 무리들이 그를 메시아로 또 왕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유사 이래 제왕들과 많은 개선장군들의 화려한 입성행렬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근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행렬은 지금도 거의 전세계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날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를 영접한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 나라, 여러 민족,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과연 메시아이십니다. 둘째는 예수는 과연 평화의 왕이십니다. 셋째는 예수는 만민을 섬기려 오신 왕이십니다. 이제 하나씩 종려주일에 선포된 진리를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예수는 과연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는 본래 히브리말인데,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또 헬라말로는 그저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옛날부터 유대 나라에서는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을 세울 때에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또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직분을 겸한, 곧 메시아가 장차 와서 그들을 구원하리라고 믿어 왔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직분을 겸한 구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는 과연 그의 많은 교훈을 통하여 예언자의 직분을 하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셨고, 또 만민을 그 마음 속에서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일찍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에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는 다시 묻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에 시몬 베드로는 곧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종려주일은 주는 과연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 날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그저 한 위대한 종교가, 도덕가, 혹은 사회혁명가라고 운운하는 이들이 있지만, 예수는 사실 그런 분만은 아닙니다. 예수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한 민족의 구주만이 아닙니다. 세계 인류의 구주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는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입니다. 둘째로, 예수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탔습니다. 옛날부터 말은 전쟁에 사용된 짐승이요,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주님의 행렬은 창검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였습니다. 모두 평화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왕이십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인간이 가장 갈급히 찾는 것은 평화입니다. 옛날 유대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에 첫 인사는 ‘샬롬’ 곧 평화를 빌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누구를 만날 때에 ‘평안하십니까?’ 혹은 ‘안녕하십니까?’ 곧 평화를 기원합니다. 더욱이 요사이 평화통일을 위해서 1,600여 만이나 서명한 것을 보면, 우리 동족 간에 평화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하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이 땅에는 평화가 아직 없습니다. 한반도에도 없고 중동지방에도 없습니다. 평화를 구하나 평화는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모든 불화의 근본은 죄입니다. 욕심, 야망, 교만, 시기, 지배욕 등 죄악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소멸하심으로 인류에게 평화를 회복하여 주십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는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또한 그를 영접하는 이들의 심령 속에 또한 평화를 주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회복합니다. 가정의 평화, 민족과 민족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열망하는 평화통일도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도 꼭 기억하고 우리는 더욱 5천만복음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만민을 봉사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폭력을 통한 지배가 아니고 사랑으로 봉사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고, 슬픈 자를 위로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사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는 일생토록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왕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종려주일을 당하여 선포된 이 봉사의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오직 봉사만이 참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성공의 비결을 생각할 때에 흔히 많은 지식이나, 금전을 많이 쌓는 것이나, 혹은 권력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들 자체는 성공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얼마나 사회와 민족을 봉사하느냐? 인류를 봉사하느냐? 곧 봉사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미국 역대의 정치가들 가운데 아마 제일 존경을 받는 이는 아브라함 링컨일 것입니다. 그는 그 대통령의 권력을 통하여 가장 많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곧 수많은 흑인들을 해방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0세기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전세계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 그 가운데도 슈바이처 박사가 제일 많이 알려졌고 존경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도 그는 흑암대륙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봉사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한 까닭일 것입니다. 참 성공의 비결은 봉사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전인류를 봉사하시었습니다. 둘째로 참 행복의 비결도 봉사임을 이 종려주일은 선포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주는 자가 가장 행복합니다. 주님 자신도 그 십자가의 전적 봉사를 통하여 가장 큰 즐거움, 곧 행복을 맛보신 것입니다. 주님의 파송을 받아서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오는 제자들이 기쁨으로 보고를 드렸다고 복음서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내가 전도한 이들이 세례를 받고 혹은 직분을 받게 될 때에 그 기쁨은 오직 전도하는 이들만 맛볼 수 있는 행복입니다. 내가 도와준 고아, 혹은 학생이 자라나서 잘되는 것을 보는 기쁨은 오직 그러한 봉사를 하는 이들만 맛볼 수 있는 행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 왔다가 가는데, 문제는 내가 받는 것보다 얼마나 더 주고 가느냐? 봉사하고 가느냐? 참 행복의 척도는 이 봉사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사실 봉사는 참 위대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좋습니다. 그러나 위대하게 되는 길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친히 자기 생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봉사를 통하여 가장 위대하신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동서고금에 위대하다는 말을 듣는 인물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잠깐 각각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대하다는 정치가, 위대한 학자,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실업가, 위대한 교육가, 위대한 종교가 등등, 참 위대의 비결은 봉사임을 이 종려주일은 또한 선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종려주일은 옛날 예루살렘 성에는 한 위기적인 운명이었음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예수를 영접하느냐? 입성하시는 이 예수를 영접하느냐? 혹은 배척하느냐? 하는 것은 장차 예루살렘의 운명을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제자들과 같이 따라온 적은 무리는 예수를 영접하였으나, 대다수 특별히 당시의 권력층들은 예수를 배척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이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탄식하신 대로, 주후 70년에 그 성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대로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곧 영접했어야 할 평화의 왕을 영접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뿐만 아니고, 모든 성, 모든 나라, 모든 민족, 아니 각 개인에게도 그 운명이 결정되는 중대한 일입니다. 그를 영접하면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에 평화가 이릅니다. 그를 영접하면 우리도 봉사의 비결을 배워서 참 성공과 행복과 위대한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 기쁜 종려주일에 우리 모두가 중심으로 예수를 영접하며 우리뿐이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가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입성하신 그날을 기억하면서 그날에 선포된 진리를 저희들이 다시 한번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는 과연 메시아이시요, 예수는 과연 평화의 왕이시요, 예수는 만민을 봉사하기 위해서 오신 왕이신 것을 다시 한번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이 예수를 우리 중심에 영접하여 과연 예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뿐만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가 오늘 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이 수난 주간에 특별히 영접할 수 있는 이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간구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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