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6:8/ 전두환 장군을 위한 조찬기도회/ 한경직 목사
2014-08-26 09:21:59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또 우리 국가를 위해서 특별히 많은 수고를 하시는 위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같이 수고하시는 여러 위원들, 또 여러 동역자들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때에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리오마는, 특별히 이러한 때를 당해서 우리가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 잠깐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여러분께서 이미 들으셨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하시는 우리 인간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되겠느냐? 여기에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첫째는 공의를 행하라,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라, 셋째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옳게 살기를 원합니다. 의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얼마나 간절히 원하느냐? 주린 자가 음식을 구하는 것처럼 원하느냐?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는 것처럼 원하느냐? 간절히 의를 찾아서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 이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줄 것을 주라고 그랬습니다.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세를 받을 이에게 반드시 세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공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의를 설명할 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먼저 분배의 공의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공적과 노력과 공헌을 따라서 분배할 줄을 아는 것이 공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의 공의가 있는데, 그것은 보상의 공의라고 하였습니다. 상을 줄 사람에게 상을 주고 벌을 줄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 공의라는 것입니다.

사실 공의는 우리 인간 관계에 있어서 첫째 되는 원리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의가 요구됩니다. 그러니 자연히 정치에 있어서 공의가 요구됩니다. 사법에 있어서 공의가 요구됩니다. 특별히 재판에는 공의가 요구됩니다. 행정에도 공의가 요구됩니다. 율법에도 공의가 요구됩니다. 옳은 법만 세워야 됩니다. 모든 경제생활에 공의가 요구됩니다. 노사관계, 빈부문제, 모든 사회에 있어서 공의가 요구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먼저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둘째로 하나님은 인자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이신데 이 공의와 자비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올시다. 죄인은 다 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올시다. 죄를 다 벌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이 만민의 죄를 대속하셔서 대신 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또 그런 아들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에서 죄인이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 해방 후에는 옛날은 감옥이라고 하던 곳이 교도소란 말로 변했습니다. 그건 의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교도소라고 하는 곳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다 인도해서 새 사람을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하겠다는, 그런 참 자비로운 생각 가운데서 이름이 그렇게 변한 줄 압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다 벌할 수 있지만 문제는 벌하는 데서만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이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옳은 국민이 되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다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자비의 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늘 감사히 생각하는 것은 우리 육군에는 군목제도가 있고, 또 우리 경찰에도 경목제도가 있어서 군인들과 또 경찰, 특별히 처음으로 구치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그들을 선도할 수 있는 제도가 확립된 것을 보고 늘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듣건대, 우리 교도소만은 일찍이 자유당 정권 때에는 제도적으로 형목이 있었는데, 4?19 이후에 형목 제도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비공식으로 가서 전도도 하고, 상담도 하는 교역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제도적으로 없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가장 필요한 곳에 이 제도가 없어졌어요. 이런 문제 같은 것도 우리가 다시 좀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실 이 공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인간의 힘만으로 부족합니다.

여기에 셋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두 가지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의 힘이 부족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 같이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걸어간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경건한 생활입니다. 성결한 생활입니다. 진실한 생활입니다. 먼저 내 생활이 깨끗해야 온 사회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런 경건한 신앙생활로 들어오는 길이 무엇인가? 여기에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히 서로가 인간인 것을 알고, 인간은 약하다고 하는 것도 알고, 내 허물을 서로 깨닫고, 내 죄를 서로 알아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겸손한 이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들어오는 것을 여기에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

일찍이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어떤 젊은 사람이 와서 묻기를 “참된 신앙생활로 들어오는 첫 계단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어 대답하는 말씀이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둘째 계단은 무엇입니까?” 대답하는 말씀이 “그것도 겸손입니다.”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럼 셋째 계단은 무엇입니까?” 다시 대답하는 말씀이 “그것도 겸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께 나오는 길입니다. 겸손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올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지존무상하신 하나님이올시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이 겸손한 마음 속에 임재하셔서 같이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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