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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4:1-8/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 / 한경직 목사 2014-08-25 19:17:50 여러분 기억하신 대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두 주일 전에도 같은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두 주일 전에는 1절에서 5절까지 전반부를 생각해 봤는데, 이 시간에는 계속해서 6절로부터 8절까지 마지막 부분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6절로 8절까지에 있는 말씀을 그저 제목을 삼아 기억하기를 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6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관제’란 말은 옛날 사람들이 신을 숭배할 때에 제단에 붓던 제주(祭酒)를 의미합니다. 기름이나 포도주 같은 액체는 그 제단 아래 부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일생의 삶을 하나님의 제단에 붓는 제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심령 깊은 속에는 그리스도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제단 위에 그의 삶 전체를 제물로 부었습니다. 그의 학식도, 그의 문벌도, 그의 청춘도, 그의 지력도, 그의 체력도, 그의 정력도 그리고 최후에는 문자 그대로 그 몸 속에 흐르던 피까지 그리스도의 제단에 문자 그대로 다 부었습니다. 위대한 삶에는 그의 심령 깊은 곳에 제단이 있습니다. 그 제단 위에 생명 전체를 붓는 것이 위대한 삶의 비결입니다. 일찍이 일제시대에 이북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설립하신, 3?1 운동 때 33인 가운데 한 분이신 남강 이 승훈 선생은 세상을 떠나실 때에 색다른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곧 “내가 죽은 후에는 나의 시체는 땅에 묻지 말고 서울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보내서 의학도들의 실험용으로 쓰게 하여라.” 이것이 유언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당국의 제지로 그대로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잘 압니다. 남강 선생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재산, 자기의 시간, 자기의 정신 일체를 다 바치다가 마지막 죽게 되니 남은 것은 시체 하나뿐이었습니다. 선생은 그것까지 민족의 제단 위에 바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실로 그의 삶은 위대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조국의 제단에, 어떤 이는 사회정의의 제단에, 어떤 이는 교육의 제단에, 어떤 이는 과학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그 제단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모든 위대한 삶에는 반드시 그 심령 속에 제단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깊은 속에는 무슨 제단이 있습니까? 그것은 헌신의 방면을 따라서 다소 다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심령 가장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의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일찍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완성한 존 낙스는 늘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주여,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세요. 그렇지 않으시면 나는 이 시간 죽습니다.” 그의 심령 깊은 속에도 조국과 그리스도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금년은 한국 개신교 1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이렇게 조국과 그리스도의 제단이 그 심령 깊은 속에 있는 기독 청년들이 많이 일어난다면, 한국의 장래는 광명하고 한국은 앞으로 우리 아시아에 있어서 첫 개신교 국가가 될 것이요, 문자 그대로 우리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관념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흔히 죽는 것을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아무개 세상 떠났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의 원어인 헬라어 ‘아날루시스(analusis)’라는 말은 ‘떠난다’고 번역이 되었는데,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령 ‘멍에를 벗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밭을 갈던 소나 말의 목 위에서 멍에를 벗기고 쉬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수고하던 모든 멍에를 이제는 벗어놓고 평안히 쉬고 안식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성도의 죽음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아날루시스’라는 말에는 ‘수갑을 벗긴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손에 채웠던 수갑, 문자 그대로 사도 바울은 죄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죽음은 손에 채워졌던 수갑을 벗어놓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넓게 생각하면 성도의 죽음이란 수갑과 같이 우리를 얽매이는 이 육신을 벗어놓고, 우리 영혼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의 죽음은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아날루시스’란 말은 ‘천막의 줄을 푼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여름철이라 많은 우리 동포들이 해변가에서 혹은 깊은 계곡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생활을 즐깁니다. 그러다가 휴가를 다 마친 후에는 천막의 줄을 풀어 천막을 말아서 등에 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성도의 죽음이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잠깐 와서 장막 집 같은 육신 속에 살다가 때가 이르면 장막 집에서 떠나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현세에서의 삶은 이렇게 잠깐입니다. 성도의 죽음이란 큰 집으로, 작은 장막 집에 살다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생각합시다. 이 헬라 원어는, ‘닻줄을 푼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장사꾼들이 배를 타고 어떤 항구에 들어와 닻줄을 매어놓고 항구에 올라와 팔 것을 팔며, 살 것을 다 사고, 볼일을 다 본 후에는 다시 자기 배로 돌아와 이제는 닻줄을 풀어놓습니다. 풀어놓아 배의 방향을 돌려 멀리 다른 항구를 향해 떠납니다. 인간의 삶이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육신의 생명이란 작은 배를 타고 이 세상이란 항구에 머물러 볼 일을 다 본 후에는 다시 닻줄을 풀고 망망한 대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이때에는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의 항구, 곧 영생의 포구를 향하여 떠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죽음이 이러합니다. 그러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큰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기록합니다.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을 하나의 스포츠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도 올림픽 경기가 유명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는 대로 올림픽경기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선한 싸움’이란 말은 전쟁에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포츠 게임에서 잘 싸웠다는 의미입니다. 금번 LA에서 열리는 올림픽 게임에 한국 청년 두 사람이 제일 먼저 조국에 금메달을 안겨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 두 청년은 모두 잘 믿는 크리스천입니다. 김원기 군은 승리한 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대구 계성고등학교 출신인 안병근 군도 온 가정이 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합니다. 실로 두 분이 다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여자농구팀은 금메달은 받지 못했어요. 은메달밖에는 타지 못하였으나 모두 잘 싸웠다고 칭찬을 합니다. 선한 싸움이란 정직하게, 규칙대로 싸울 뿐더러 전 정력과 기량을 다 바쳐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포츠 정신이란 비록 승리는 거두지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또한 이러합니다. 비록 어떤 방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할지라도 일생을 정직하게, 전 정력을 다 바치면 그러한 분은 양적으로는 비록 부족하다고 하여도 질적으로 보면 그는 승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비록 큰 정치가나 기업인과 같이 그 명성을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러한 스포츠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하면 그는 참된 의미에서 성공한 분입니다. 그리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육상 경기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혹은 마라톤 경주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입니다. 삶의 경주에서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 마지막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사람을 보는 데는 그 전반생을 보지 말고 후반생을 보라고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릴레이 경주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바톤을 꼭 손에 쥐고 뛰어야 합니다. 이 바톤을 떨어뜨리면 아무리 잘 뛰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큰 정치가가 되었고, 기업인이 되었고, 과학자가 되었고 학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믿음이란 바톤을 떨어뜨렸다고 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실패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는 그의 삶은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명성을 얻고 성공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믿음이란 바톤을 떨어뜨리면 그 삶은 영원한 의미에서는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면합니다. “믿음을 지키라” 믿음을 지킵시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면류관으로 마칩니다. 옛날 그리스시대에 올림픽 게임의 승리자들에게는 월계수 가지로 엮은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워 주었습니다. 요새는 금메달을 주지만 원래는 이런 면류관을 주었습니다. 이 월계관을 쓰기 위하여 옛날 올림픽 선수들은 그의 전 정력을 기울여 싸우고 또 뛰었습니다. 그러나 이 월계관은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며칠 후에는 시듭니다. 여러분, 이러한 월계관을 위하여도 그들은 힘껏 싸우고 뛰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분명히 들으세요. 신앙 선상에서 싸우고 달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준비된 면류관은 시들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영원한 ‘의의 면류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면류관을 준비해 놓으시고, 여러분의 싸움과 달리심을 주목하여 보시면서 또 기다리고 계십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 하나하나는 이러한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바라고 또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는 다 이 삶의 경주장에서 달음질을 하는 경기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지켜 주시고, 하나하나를 도와주시고,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한 사람도 이 경기장에서 탈락되지 아니하고 누구나 다 끝까지 달릴 수 있게 해 주시고, 주님 준비하신 최후의 면류관을 받는 큰 축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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