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20:20-30/ 여호와의 등불 / 한경직 목사 2014-08-23 20:33:06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二十․二十七)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창세기 二장 七절에『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몸은 흙으로 되었습니다. 물질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산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해서 욥기 三十二장 八절에는『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느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혹은 전도서 十二장 七절에는『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혹은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서 돌아가기 전에(조물주를)기억하라』고 하는 권면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유물론자가 한 목사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목사님께서는 우리 인간 육체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까?』그 목사가 대답하기를『나는 사실인줄 믿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청년이 하는 말이『내가 아무 대학 부속 박물관에 가보니 사람을 분석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의 육체 속에는 수분이 몇 퍼센트, 광물질이 몇 퍼센트, 탄수화물이 몇 퍼센트 등으로 열 여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 실험 병에다 넣었는데 그게 인간의 전부이고 영혼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 목사가 말하기를 그러면『당신에게는 그런 물질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가?』했더니 그이 대답이『나는 그런 줄로 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당신과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왜? 토론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요.『당신과 같이 물 얼마, 광물질 얼마, 탄수화물 얼마로 된 사람과 나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인간이 물질뿐이면 유물론을 생각하는 그 자신이 부정됩니다. 없어지고 맙니다. 과연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이 영혼에는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 가운데『인간은 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심히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입니다. 생각도 보통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창작을 하는 생각입니다. 즉 이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천년 전에 지은 집이나 오늘날 지은 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호랑이는 단군 할아버지 때에도 굴속에 살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굴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주 원시시대에 굴속에서 살던 혈거시대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지금도 삼성(三性) 혈(穴)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조그마한 구멍들이 있습니다. 아마 옛날 제주도의 삼성 조상들이 살던 굴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주도 사람은 굴속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사실은 몇 해 전에 지은 집과 요사이 짓는 집이 다릅니다. 여러분, 서울 주변을 다녀 보세요. 얼마나 새로운 형태의 주택들이 세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성이 있어서 간단없는 새로운 것을 창작합니다. 이 이성의 빛이 과학을 발전케 하였습니다. 적은 현미경도 말들었습니다. 이 적은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던 많은 세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이 되어서 많은 병을 알게 되어 고치게 되었고 예방의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이 망원경을 통해서 대 우주를 탐색하고 발견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원자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자핵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원자력을 발견했습니다. 원자탄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없던 새로운 능력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을 통해서 여러 가지 과학의 이기가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비행기, 혹은 라디오 혹은 텔레비전 혹은 우주선이니 해서 우리 인간생활에 큰 변혁을 오늘날에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마 지금 이 시간도 제미니 五호 가운데는 우주인 두 사람이 이 지구를 선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이성의 빛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사회나, 예술이나, 음악이나, 모든 방면의 새로운 발전과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창작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성의 불은 본래 하나님께서 부쳐주신 것입니다. 이성의 불을 우리 인간은 끄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방면에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이성의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감정에만 휩쓸리면 되지 않습니다. 이 이성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인간의 고집과 독선과 편견과 선입관과 감정과 권력의식과 교만과 같은 죄악들이 이성의 빛을 희미하게 하고 심지어 꺼지게 하고야 마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성의 빛이 밝아야 우리 개인의 생활이나 국가생활을 바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깊숙한 곳에 다른 빛을 또 하나 주셨습니다. 로마서 二장 十四절--十五절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인간의 깊은 속에 새겨진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신 다음에 누구에게든지 그 심경 속에 이 양심의 등불을 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한 복음 八장에 보면 예수 님께서 한 번은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어떤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선생이시여, 모세의 율법을 보면 이런 여자는 당장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받으시고 곧 대답지 않으시고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셨습니다. 빨리 대답하라고 성화가 시작됩니다. 이윽고 머리를 드신 예수 님은 조용히 그들에게 말씀을 던지셨습니다.『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져라.』그리고는 다스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보고 무슨 글씨를 쓰시고 한참동안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후에 머리를 들고 보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슬며시 다 떠나가고 여자 혼자만 서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곳을 떠나게 하였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대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양심의 채찍이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들의 깊은 속에는 이 양심의 등불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심령에 이 양심의 등불을 켜놓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도『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 속에는 양심 곧, 도덕적 의식이 있다』고 감탄한 것입니다. 이 등불이 있으므로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영광이 사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능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양심대로 살아야 그것이 참 인간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누구나 고려말엽의 충신, 정 포은 선생의 시조를 다 기억할 것입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라는 말로 시작해서『백골이 진토 되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줄 있으랴.』 우리가 왜 지금까지 이 시조를 기억합니까? 이 간단한 시도 가운데 정 포은 선생의 심령 속에 잎이 있는 양심의 밝은 빛이 간단한 이 시조를 통해서 비추이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 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의 불이 꺼지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생활에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강한 욕심들, 즉 정욕, 물욕, 권세욕 등 강한 욕심 때문에 이 불이 희미해지고 어떤 때는 꺼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가 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불이 꺼지면 그 사람의 생활은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네게 있는 빛아 우두 우면 캄캄한 밤과 같아서 그 생활은 암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양심의 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이상의 빛, 양심의 빛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누구에게나 주신 들불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등불이 있으니 성령의 빛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할 때에 그는 외쳤습니다.『나는 물로 너희에게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 신들 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장차 너희에게 성경을 불로써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二장에 보면 오순절에 一二0명에게 처음으로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실 때에 불같은 혀가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불은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새로운 성령의 등불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요한 복음 十四장 十七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우리 속에 이 등불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생활을 지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믿는 진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옛날 사도들의 전도여행을 인도하였습니다. 회개하는 모든 길을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도시대 교회의 일과, 직분을 통하는 일과, 모든 활동을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시대만은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과 온 교회를 성령의 빛으로 지도하여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성령의 밝은 빛 아래에서 내 생활을 스스로 살피고, 내 말을 스스로 살피고, 나의 행동을 스스로 주재해야 될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분석하면 흔히 일곱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에 보면 성령의 빛을 아홉 가지로 나타난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갈라디아 五장을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는 것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을 따라서 행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강한 욕심이나 편견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도 있고, 성령이 지시하는 불빛을 희미하게 만들 수도 있고, 마지막에는 소멸케 할 수도 또한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양심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성의 등불을 켜 주었습니다. 성령의 등불로 우리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든지 이 빛으로 살고 이 빛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燈檠) 위에 두어 모든 방안 사람들에게 비추이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비추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五장 八절 이하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에 보면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을 달음박질하는 경주에 비하여 말씀하신 데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신자의 생활은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하세요. 무슨 경주냐고 하면 촛불을 손에 들고 하는 촛불경주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갈 길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길도 비추어 줄 수 있습니다. 촛불을 가지고 달음질하는 경주라는 것을 내가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손에든 촛불은 어떻습니까? 촛불예배에 참석해 보신 분은 이런 경험이 다 있는 줄 압니다. 처음 예배를 시작할 대는 초 하나에 물을 켭니다. 초 하나의 불은 작고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 초 하나로 시작해서 옆에 있는 초에 불이 붙습니다. 또 다른 초에도 붙여집니다. 촛불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다섯이 되고, 열이 되고, 오십이 되고, 백이 됩니다. 마지막에 교회당 안에 천명이 있으면 천명의 불이 다 붙게 됩니다. 그러면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내가 적은 촛불 하나가 이 캄캄한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적은 촛불이지마는 내가 이 불을 밝히고, 친구가 밝히고, 믿는 사람 전부가 밝히고, 즉 오늘날 한국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어디 있든지 이 양심과 이성과 성령의 불을 밝힌다고 한다면 이 삼천리 강산은 환하게 비췰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여러 사정을 본다면 민망할 때 많이 있습니다. 극한이 극한을 대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감정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빛은 잃은 듯 싶습니다. 양심의 빛이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성령의 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이 이성과 양심의 빛이 꺼진다고 하면, 마치 그 사람의 생활은 캄캄한 밤에 불 없는 자동차가 마구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동차의 앞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이 불이 빛납니까? 우리 사회에 이 불이 빛납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등불이라.』 우리는 이 등불을 밝혀서 우리의 생활을 밝히고 우리의 사회를 밝히는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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