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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6:13-20/ 영혼의 닻 / 한경직 목사 2014-08-23 08:36:55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六․十九)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다고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이 세상을 바다에 비유해서 생각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한 고해 같은 세상이라고 괴로운 바다 같은 세상이라고 이런 글을 읽을 수도 있고 이런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인생이란 이 풍파 높은 바다에서 한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지나지 못합니다. 한 조가 작은 배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망한 바다에 한 조각배와 같은 것이 인생의 일면이올시다. 베에는 꼭 있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닻입니다. 큰 파도가 일어날 때에 이 닻이 깊은 바다 밑에 박혀있어야 배가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꼭 이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소망이올시다. 소망은 닻과 같다고. 그래서 예산부터 닻은 소망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이 영혼의 닻을 생각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닻, 큰배를 큰 닻이 있습니다. 물론 한강에 떠 있는 노름 배 같은 것은 닻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노름 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작아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라고 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배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매일 일하고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를 합니다.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실업가는 소망으로 공장을 경영합니다. 부모는 소망을 가지고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 모든 사업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잠재합니다.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울지라도 인내하여 무슨 일을 계속하는 그 배후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이 경제 五개년 계획을 세우며 혹은 화폐를 개혁하며 여러 가지 곤란을 당할지라도 참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 조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소망이 없으면 사람이 일하지 아니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아니합니다. 계속하지 아니합니다. 더욱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냥 인내하지 아니합니다. 더욱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희생을 제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화폐 개혁 이야기를 잠깐 하였지마는 긴급 금융 조치법안이 발표된 이후에 신문에 보는 대로 항간에서 염려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개인의 기업 열, 개인의 사업을 하려고 하는 의욕을 손상하지 아니할까 염려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민주주의 근본 이념은 개인의 독창력을 살리고 개인의 활동할 능력을 백 퍼센트 열어주어서 각각 개인이 자기의 최대의 봉사를 하게 될 때에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모든 것이 건전한 기초 위에 설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여간 이 문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단순히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란 어떤 소망이 없으면 노력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희생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주 소망이 없어지면 살지를 못합니다. 자살이란 절망한 사람들이 최후로 취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닻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닻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실지 배의 닻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종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질에 있어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다 튼튼한 쇠로 말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신적인 닻에 있어서는 크고 작을뿐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학생의 소망은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인격을 함양하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농부의 소망은 곡식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상인들의 소망은 이익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산업가의 소망은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소망은 좋고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여 내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음악가들의 소망은 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을 창작하는 것일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소망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데게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소망이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무슨 지위나 권세 자리를 소망하고 노력합니다. 어떤 이들은 특별히 명예를 많이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큰 소망, 작은 소망, 이런 소망, 저런 소망, 소망 가운데는 여러 가지 소망이 있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소망이 여러 가지 종류이지만 이 모든 세상의 소망은 공통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런 모든 세상의 소망은 이대로 이룰 수 있고 이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망한다고 이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제 관찰이 잘못이 아닐진대 그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아마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공부한다고 다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한다고 다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손해를 보는 수가 있습니다. 지위를 구한다고 다 그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인간이 가지는 이 세상의 소망은 실망이 오는 것이고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여러 가지 소망이 많습니다. 수포로 돌아가는 소망이 많이 있습니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소망이 많이 있습니다. 꿈에 멎는 소망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 생활에 한숨과 눈물이 내포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모든 인간적인 소망에 있어서는 설사 이런 소망들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본래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어떤 청년 실업가가 새로 사업을 하면서 그가 꼭 이 사업에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며 열심으로 자기 자지 아니하고 일하고 생각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공 못하는 이들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한 이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그저 사업만 성공하고 돈만 모으면 천하를 얻을 것처럼 생각되지마는 정작 사업에 성공해 놓고 보면 또는 돈도 모아놓고 보면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가 많이 닥칩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돈을 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여러 가지 변태 무쌍(無雙)한 사회는 항상 공포를 가져옵니다. 설사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모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환멸의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사이 웬만한 젊은 사람은 다 사진기 하나씩 가지고 다닙니다. 아마 그 사진기 가운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아마 이스트맨 코닥(Eastman Kodak)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 이스트맨 이라고 하는 사람이 미국인으로서 제일 먼저 손 사진기를 만든 사람이올시다. 필름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올시다. 로체스터 뉴욕(Rochester New York)에 가 보면 이스트맨 코닥회사(Eastman Kodak Company)가 한 들판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돈을 몇 억을 모은 모양이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이 이렇게 크게 성공하고 돈도 많이 모았지마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인생의 환멸을 느껴서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 바라볼 때 굉장한 것 같지마는 결국 얻어 놓고 보면 여기에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가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어떻든지 이번에 꼭 석사가 되고 박사가 꼭 되어야지. 박사 학위를 내가 받을 테야.』열심으로 공부하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런다고 다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이들 가운데 더러 박사가 됩니다. 그러나 혹 박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작 박사가 되고 보면, 그것 뭐 별 것 아닙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에도 박사 된 이가 더러 계신 줄 알지만 정작 되어 놓고 보면 별 게 아닙니다. 혹 관청에 있는 이들은 아마 이런 생각 자연히 있을 것 같아요. 혹 과장쯤 되는 사람이면 그 국장 한번 되어 보면 좋겠다고, 국장쯤 된 사람은『아이고 나 장관 한 번 되어 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굉장히 소망을 두고 힘씁니다. 아나 그런 생각 누구나 다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국장이 되어 보면 그것 뭐 별 것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 같은 데서는 장관 됨으로 말미암아 큰 화를 입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여기 어떤 젊은 사람들 결혼 기에 있어서 어떤 이상에 맞는 상대자를 구했다고 하면『내가 이분하고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고…….물론 이렇게도 생각합니다.『아, 내가 이 남자하고 결혼했으면 좋겠다.『아 내가 이 여자와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그저『결혼하면 참 행복이 있을 테다.』간절히 원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다 결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혹 결혼이 된다고 할지라도 보통 경험을 보면 결혼한 후에 몇 달 지내보면 또 그것도 별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 세상에는 천사는 없습니다. 지내보면 그게 그것이란 말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가지는 소망은 우리가 설사 그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만족은 찾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공통한 경험이올시다. 마치 바다 물 속에 들여다보이는 해초와 같아요. 물 속으로 들여다볼 때에는 그 바다 물 속 해초가 아주 아름답게 보입니다. 참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정치입니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서 해초를 움켜쥐어서 꺼내보면 그것 별 것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한다고 하는 소망은 흔히 마지막에 환멸의 비애로 종막을 거두는 것이 보통 경험이올시다. 또 이 모든 세상 소망은 설사 우리가 이 세상의 소망을 성취해서 어느 정도의 기쁨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순간적입니다. 잠깐뿐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쇠할 때가 있습니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집니다. 떨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썩어집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덧 흰 서리 가 우리 머리 가에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우리가 숨결을 내 쉴 수밖에 없게 되면, 백만장자면 무엇하며 박사면 무엇하며 대통령이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의 소망은 설사 그대로 성취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아침 안개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져 없어집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은 절망의식은 재로 화하고 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참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썩는 소망, 죽는 소망이 무슨 소망입니까? 그러므로 이것들은 사실 영혼의 닻은 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은 영혼의 닻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여 줍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아서 기다릴지니라. 우리들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니라.』 불멸의 영혼의 닻이 어디 있습니까? 참 영혼의 닻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시편 六十二편 五이하를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좋아 나는 도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이것은 공상적으로 어떤 이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표현에 의지해서 생생한 체험, 피 어린 체험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솔직히 고백하는 말씀이올시다.『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오직 주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七十一편 五절에는『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 시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 우리 불멸의 영혼의 닻이 되십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一장 二十七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올시다. 왜? 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떠한 풍파가 있을지라도 요동하지 아니합니다. 왜? 하나님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十三장 五절에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十장 二十八절에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약속을 하였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혼의 닻으로 삼는 이는 어떠한 실패, 어떠한 타락, 어떠한 환난, 어떠한 슬픔이 있을지라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 배가 밀려가지 아니합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아니합니다. 파선하지 아니합니다. 요사이 신물을 보면 우리 사회상이 더 암담하여지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보니까 하루에 자살 사건이 일곱 번이나 일어났고, 그것은 알고 나타나는 것만 그렇지, 사실 모르는 것은 그 보다도 수가 더 많을 줄 생각합니다. 한강에는 목욕하느라고 다이빙(diving 뛰어들기)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살 다이빙이 너무 많아서 특별히 경비원을 배치해 둔다는 신문 보도도 우리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실로 비통한 사회 실정이올시다. 한국이란 좁은 바다에 사실 풍파가 너무 심합니다. 三八선의 풍파가 있습니다. 六․二五 사변 三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 냉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학생 혁명의 파도가 높았습니다. 머지 않아 군사 혁명의 파도가 또한 높았습니다. 또 화폐 개혁도 상당한 풍파 같습니다. 이렇게 풍파가 높은 바다에 닻이 없는 배를 타고 다니는 우리 동포들이 너무 많습니다. 영혼의 닻이 없는 배를 가지고 이 풍파 높은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파선을 당하는 가련한 인생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여러 가지 자살의 이유가 있지요. 실직이 하나요. 사업 실패가 그 둘째요, 혹은 실연 혹은 신병,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한 마디로 말하면 소망의 닻이 없는 까닭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리 사업에 실패했어도, 아무리 실직을 했어도, 아무리 병이 났어도, 아무리 실연을 했어도, 소망이 그 영혼에 있는 사람, 영혼에 닻이 있는 사람은 자살하지 아니합니다. 왜? 영혼의 닻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까닭입니다. 아무리 동해 바다의 파도가 높다고 하지마는 금강산 一만 二천 봉과 같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튼튼한 영혼의 반석을 의지하는 영혼의 닻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망이란 말은 없습니다. 이 영원불멸의 영혼의 닻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이 닻을 붙잡았습니까? 내가 과연 이 닻을 붙잡았다고 하면 이 예배당 문 밖에 닻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노도광풍에 시달리는 가련한 우리 민족에게 이 영혼의 닻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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