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4:10-20/ 일체의 비결: 자족/ 한경직 목사 2014-08-23 07:35:39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四․十一-十三)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릴보 교인들에게 그 예물을 보낸 것에 대해서 감사한 인사와 함께 겸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을 배웠노라. 그리해서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성(豊盛)에 처할 줄도 알아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시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자기의 신앙을 간증하셨습니다. 생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여기 본문에 있는 대로 첫째는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둘째는 그는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또한 배웠습니다. 셋째는 그는 또한 풍부한 생활에 처할 줄 아는 비결도 배운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의 생활을 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면 이것이야말로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六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자족한 마음이 있으면 경건(敬虔)에 큰 유익이 되는데 우리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세상에서 갈 때에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그저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이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이 자족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이 편지를 쓸 그 때에 헬라의 많은 철학자들 가운데도 이 자족에 대해서 교훈 한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에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자족을 그들의 윤리의 최고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행동의 가장 높은 덕은 이 자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 철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보통 우리 동양식으로 말한다고 하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심경에 있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 철학자들은 이 자족의 심경에 이르는 길을 간단히 두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모든 욕망을 더는 길입니다. 그들이 늘 하는 말대로 물건을 더 할 것이 아니고 욕망을 덜음으로써 사람은 자족한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늘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 십 만원 돈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족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백 만원 돈 가진 사람도 항상 부족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한 사람은 돈은 많지마는 그 보다 욕망이 더 큰 까닭이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든지 욕망을 줄이는 것이 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의 소위 욕정을 금하여 온전한 자리에 나간다고 하는 교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어떤 물건도 원하지 말고 아무 사람도 원하지 말라.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지경이야말로 온전한 자족의 지경이라고, 심지어 내 생명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리라고, 그래야 온전한 그 자족의 자리에 이른다고 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대표적 인물이,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간단한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는 무슨 통나무 위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서 통나무 위에 앉아 있노라니 까, 그 때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하는 이가 유명한 철학자를 찾아보러 왔습니다. 와서 그 대왕이 하는 말이『선생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다 드릴 수 있는데 무엇을 원하는가?』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답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당신이 내 앞에 서서 햇빛을 가리우니 좀 비켜서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이르러야 자족의 자리에 이른 것이라고 이 분들이 가르쳤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자족의 자리에 이르려면 감정을 말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무엇은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감정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자족이 깨지고 안심이 깨지니까 이런 모든 감정을 할 수 있는 대로 말살해서 감정을 초월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령 쓰던 그릇 같은 것이 깨졌을 때 어떤 부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아예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그릇 깨진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큰 그릇이 깨져도 그렇게 생각하고, 혹, 내가 사랑하며 기르던 고양이 같은 것이 그만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감정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여기 그런 방면으로 힘을 쓴 에피크레터스라는 사람은, 본래 종으로서 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며 감정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초월하나 보자고 하여 그 사람의 다리를 막 비틀었습니다. 그러니 아플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도 한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비트니까 이 사람 하는 말이『당신 네 들이 내 다리를 비틀면 아마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아 그래도 이 악한 사람들이 그냥 비틀어서 결국은 다리가 뚝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아프다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하고『그렇게 자꾸 비틀면 부러지겠다고 내가 그러지 않습디까?』그 말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 이렇게 감정을 순전히 초월하는 가운데서 큰 자족의 경지에 이른다고 믿고 이렇게 하려고 애썼고 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순전히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써 이것을 성취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사실 인간의 힘으로써 이런 방면에 이르기까지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몇 사람 안 되는 모양입니다. 또 혹 이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되어버린다면 그게 목석이지 어디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스토익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광야로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평화라 하고, 이것이 자족이라 말한다고 비평한 것입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을 배웠노라』고 하였는데 어떤 길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습니까? 욕망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감정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연구해 보면 사도 바울은 욕망을 말살하지 않고, 보다 더 고귀한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성취함으로 자족을 얻은 것입니다. 빌립보 三장 七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깨닫고, 그리스도를 사실 알고 보니 그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그 지식을 알고 그리스도와 서로 동행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모든 세상의 욕망을 자연히 봄 동산의 눈처럼 쓰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보지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만족한지,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간 비결입니다. 또한 감정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정을 말살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고귀한 감정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자기가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의 지경에 들어가게 될 때에 그의 심정은 그냐 말로「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가게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참된 만족과 환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같이 계실 때에 모든 것이 다 없어도 그는 부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리해서 억울하게 매를 마고 밤에 깊은 감옥에 갇혔어도 실라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마음에 항상 만족이 있었습니다. 깊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얼마 안 되어 교수대에 오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어서도 항상 그는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큰 지중해 풍파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고, 모든 사람이 낙심 천만하게 될 때에도, 오직 사도 바울 만은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사자가 그와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선지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박국 三장 十七절 이하를 읽으면 이런 노래를 불렸습니다. 장차 큰 재난이 올 것을 자기가 내다봅니다. 그러나 들어보세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사도 바울의 자족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十二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가시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내 몸에 가시가 있어서 항상 나를 괴롭힙니다.』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가시가 있어도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내 권능은 약한 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가시가 있으나 하나님의 권능이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족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둘째로 여기 비천의 생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는데 누구나 인생 길을 지나갈 때에 이 비천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생활이 가난할 때, 사업이 실패되는 때, 친구 없이 고독한 때, 역경에 살수밖에 없을 때, 핍박과 비난을 받게 될 때, 몸이 약하고 병석에 눕게 될 때,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서 큰 슬픔을 당할 때, 이 비천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가 누구나 있는 것입니다. 전에 욥 같은 사람은, 본래 풍부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고 자녀도 많고, 지위도 높고, 명성도 있고, 그러나 자기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갑자기 비천한 자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돈 없어지고, 자식 없어지고, 건강 없어지고, 비참한 자리에 빠졌습니다. 요셉 같은 사람도 본래 팔자가 참 좋은 아이였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나서 철을 모를 때에 그저 귀한 것 없이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심부름 갔다가 오히려 자기 형들한테 미움을 받아서 멀리 종으로 팔려 가게 됐습니다. 남의 집에서 종 사리하게 됐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비천한 자리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종종 이런 자리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리에 한 번도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북한에 계실 때에는 풍부하게 살던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三八선이 생기고 공산당이 들어오고 이렇게 돼서 피난민의 한 몸이 되어 남한에 와서 비천한 생활을 계속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계신 줄 압니다. 또 피난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五년 전 十년 전에 풍부하게 살던 이가 갑자가 어떤 사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생활이 가난해지고 비천한 자리에서 헤매는 분들도 없지 않아 계실 줄 압니다. 그리고 또 지금 모든 것이 좀 풍부하다고 하지마는 그것 믿고 자랑하지는 맙시다. 왜냐 하면 사람이 무슨 일을 내일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병은 그저 눈썹에서 떨어집니다. 사업의 실패도 하루아침에 됩니다. 하물며 한국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불안정한 이런 사회,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 언제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비천한 자리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비천하여질 때에 오는 특별한 시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때에 어떤 시험이 오는지 압니까? 비관하는 시험의 옵니다. 세상을 비관하는 낙심의 시험이 옵니다. 자포자기의 시험이 옵니다. 불평과 원망의 시험이 옵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국가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남 잘 사는 것을 시기하는 시험도 들어옵니다. 돈 좀 있는 사람을 모조리 미워하는 시험도 들어옵니다. 타락하기 쉽습니다. 자포자기해서 결국은 타락하기 쉽습니다. 비천할 때에 이와 같은 시험으로써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나를 찾아다닌다고 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이런 방면에 오는 시험을 우리가 방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이 여기 말씀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비천한 자리에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예수보다 더 비천한 자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영광은 무궁 무한하십니다. 권세가 무한하십니다. 그런 분이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친히 하신 말씀과 같이『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이 있으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죄 없이 비판을 받고, 죄 없이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받고, 말할 수 없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죄 없이 이와 같이 비천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자리에서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이 모든 것을 승리했습니다. 마지막에 부활로써 온전히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될 때에 우리가 비천한 자리에 있어도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인내의 능력을 받고, 위로의 은혜를 받고, 용서의 은혜를 받고, 풍부한 은혜를 그리스도에게서 받습니다. 여러분, 비천한 자리에 있을 때에, 절대로 그리스도를 떠나지 마세요.『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겼사오니 그 능력에서 나도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세요.』기도하고, 주님의 능력을 받으면 그 모든 시험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비천한 자리에서 새 은혜와 새 능력과 새로운 창조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실패함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병 앓음으로 은혜 받은 사람 많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병 앓음으로 은혜 받기 시작했습니다. 밀튼 같은 사람은 말년에 소경이 되었어요. 그렇게 된 후에 오히려 신령한 눈이 열려서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유명한 시를 썼어요(실락원(失樂園)). 베토벤 같은 사람은 음악가로서 귀머거리가 되었어요. 귀머거리가 되어서 아무 소리도 못 듣게 되니 얼마나 기가 막힐 것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늘의 음악을 듣고 오히려 유명한 작품을 냈습니다. 비천한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창작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질병은 물론 원해서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질병 않게 되면, 그 가운데서 은혜 받을 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나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우선 깨끗해집니다. 왜? 병나게 되면 과거의 죄를 생각하고 다 이것을 회개하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더 살찌게 됩니다. 왜? 병나게 되면 더 주님을 생각하게 되고 좀더 주님을 묵상하게 되고, 기도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병남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 받아서, 전도 많이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사실『병상은 제일 좋은 강단이다.』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큰 병 가운데 않으면서 자기 아들에게 권면할 말, 친구가 방문할 때에 권면해 준 말, 그 말은 금보다도 더 귀하고 옥보다도 더 귀합니다. 병중에 있어서 큰 일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가 알 것은 실패와 슬픔과 고통과 이런 비천한 자리에 있을 때에 들어오는 모든 시험을 주님과 같이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그 자리에서 받으면 그 자리가 큰 축복의 자리로 변화합니다. 언제든지 우리 주님은 이렇게「전화위복」곧 화를 전해서 복을 만드시는 권능 있는 주님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비천에 처하는 비결은 미천한 자리에 있을 때에 주님과 가까이 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능력으로써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이 비결을 사도 바울은 배웠습니다. 어떤 분은 비천에 처할 줄은 알지마는 풍부해질 때에 처할 줄을 몰라서 실패를 당하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 건강할 때, 평안할 때, 성공할 때, 재정적으로도 모든 것이 잘 돼서 넉넉할 때, 우리가 다 생각하기는 그저 내 생활이 조금만 더 넉넉해지면, 나는 교회 봉사도 좀더 잘 하고 십일조도 꼭 드리고 주일날 예배 시간도 꼭 지켜서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이렇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물질로 받아서 풍부해집니다. 재산이 많아집니다. 꼭 그렇게 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과히 많지 못할 줄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압니까? 풍부해질 때에는 비천할 때에 받지 못하던 딴 시험이 들어옵니다. 비천할 때에 모든 시험을 잘 이겼지마는 이 딴 시험이 들어올 땡, 이 시험을 못 이길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험이 들어오는지 압니까? 교만의 시험, 성공하면 마음 높아지기 쉬습니다. 돈 많이 모으면 돈 모이는 그 액수보다 욕심은 더 큽니다. 이렇게 되어서 돈을 더 사랑하게 되기 쉽습니다. 인색해지고, 돈 버느라고 분주해서 교회 일을 더 등한히 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 뿐인 줄 압니까? 모든 것이 넉넉할 때에는 가난할 때에 조금도 안 들어오던 무슨 시험이 들어오는지 압니까?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이 들어옵니다. 가난할 때에 경건히 교회를 봉사하던 청년들 가운데 돈 모으고 넉넉해지니까, 이런 육신의 정욕에 빠져서 일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허영심(虛榮心), 허영의 시험, 이생의 자랑, 명예심, 권리심(權利心) 따위의 시험들이 물밀 듯 들어옵니다. 풍부할 때에 조심해야 됩니다. 풍부할 때 처하는 비결을 우리가 꼭 배워야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풍부할 때에 꼭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풍부할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닫고 꼭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申命記) 六장 十一절 이하에 보면『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하나님을 잊지 말아라』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배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배부를 때에 그리스도를 잊어버리지 마십시다.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은 없습니까? 배고플 때에는 그리스도와 가까이 하더니 배부르게 되니까 그리스도를 멀리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잠언 一장 三十二절에는『미련한 자의 안일(번영이라는 뜻)은 자기를 멸망(滅亡)시키느니라.』오히려 번영함으로 말미암아, 돈 모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망치는 사람은 없습니까? 번영할수록, 풍부할수록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달아서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를 잊지 말고 주안에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풍부할수록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봉사의 기회를 주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봉사합시다. 부즉다사(富卽多事)라고, 부하면 분주하다고 하지만 세상일이 아무리 분주해도 교회 일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돈 많아지면 십일조 내는 것도 많아져서 아까워진다고 합니다. 사실 은혜 받은 사람은 십일조만 내는 것 아닙니다. 수입이 많게 되어 십일조를 자기가 쓰고도 생활할 수 있게 되면 십 구조까지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잊지 말고, 주안에서 이 길이 봉사의 기회요, 이 길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잊지 말고 더욱 내 책임을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 풍부에 처할 줄 아는 비결, 이 비결을 우리가 꼭 안아야 됩니다. 이 비결은 다른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하면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가운데 모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고 하면 옛날 성으로 비교하면 샘물과 곡식이 많은 성과 같습니다. 옛날에 전쟁할 때에는 아무리 원수가 성을 에워싸고 그 성안에 물과 곡식만 많으면 문제없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원수가 많고 나를 해하려는 악한 마귀의 궤계(詭計)가 많지마는 우리 속에 주님께서 같이 계셔서 내 속에 생명수가 있고 내 속에 생명 양식이 풍부하면 밖의 원수는 문제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만 꼭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참된 신앙으로 산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자족한 생활과 그 자리에서 행복한 생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변해야 나는 행복한 생활을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와 같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받으면,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행복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나는 뭐 지금은 불쌍한 사람이야 그러나 이 다음에야 행복한 때가 오겠지.』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를 참으로 내 마음에 영접해서 참된 신앙에 들어오면 이 순간 즉시로 여러분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늘 부르는 말과 같이『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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