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6:1-4/ 엡6:10-20/제 오 계명: 효(孝)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31:49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오늘은 총회적으로「청년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아마 이 계명이 청년들에게 적절할까 해서 제五 계명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요사이 신문을 보면 우리 이웃에 있는 중공에서는「문화 혁명」이란 이름 밑에서 청소년들을 모아 홍위대(紅衛隊)를 조직하여 도처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몇 주일 전에 신문을 보니 산둥성에 수천 년 동안 보존되어 온 공자묘까지 다 파헤쳤다고 하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공자는 옛 봉건 시대의 도덕을 가르쳤으니 새 시대에는 필요가 없다고 타파한 모양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 천년 전에 주신 계명이 이런 시대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하면 시대가 이런 까닭에 오히려 이 계명을 분명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여러 가지가 변합니다. 인정이 변합니다. 인심이 변합니다. 생활양식이 변합니다. 풍속이 변합니다. 얼굴 단장하는 모양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물은 섭씨 영 도가 되어야 얼음이 되고 백 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이건 변치 않습니다. 봄이 되어야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이건 변치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법칙은 변치 않습니다. 똑같이 도덕의 법칙도 변치 않습니다. 이 계명은 도덕의 법칙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도덕 법칙의 제일 조입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맺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면 형제를 만나기 전에 자매를 만나기 전에 친구를 만나기 전에 부모를 제일 먼저 만납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옳게 가져야 다른 사람과도 옳은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보면 제一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의무를 가르쳤고 그 다음에 우리 인간 사이에 도덕의 법칙을 가르쳤는데 먼저 부모와의 관계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경의 교훈이나 동양 성현들의 교훈이나 어느 나라의 교훈이든지 꼭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동양의 도덕을 간추려 말하면 삼강 오륜이라고 합니다. 삼강(三綱)에 제일 먼저 부의 자강(父爲子綱)이라 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오륜(五倫)에서도 제일 먼저 부자 유친(父子有親)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야 다른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즉 군신 유의(君臣有義) 부부 유별(夫婦有別), 장유 유서(長幼有序), 붕우 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효도는 도덕 법칙의 제일 조입니다. 모든 도덕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둘째로 이 계명은 사회 질서의 기초입니다. 이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범위는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비롯해서 모든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 문답 六十四문을 보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제 五 계명에 명하는 것이 무엇이뇨?』대답을 보면『제 五 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 속한 지위와 인륜 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하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그 부모를 존경하고 순복(順服)할 때에 질서가 섭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의 말을 순복하고 공경할 때에 그 학교의 질서가 잡힙니다. 회사에서 사원과 직공들이 사장을 공경하고 그 명령에 순복할 때에 그 회사와 공장에 질서가 섭니다.

관청에서 공무원들이 상관을 존경하고 그 명령에 순복할 때에 관청의 질서가 잡힙니다. 모든 국민들이 국법을 존중히 여기고 법을 순복할 때에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복하는 자녀가 학교에 가면 선생을 존경하고 순복하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을 존경하고 순복하는 좋은 직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관청에 들어가면 상관의 명령을 잘 준수하는 좋은 공무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회에 나오면 좋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가정에서 부모의 말을 순복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학교에 가서 선생을 순복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을 순복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관청에 들어가면 상관을 순복치 않고 존경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국민 가운데 많을 때 그 국가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이 계명은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되는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우리 동양의 말 가운데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 질서는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복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는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를 멸시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는 엄한 벌이 기록되었습니다.

셋째 이 계명은 영적 견지에서 볼 때 첫째 계명, 둘째 계명, 셋째 계명, 넷째 계명을 잘 지키는 신앙의 사람은 다섯째 계명도 말할 필요 없이 잘 지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하나님에게 순복할 줄 아는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순복할 줄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은 부모도 순복치 않고 공경하지 않습니다. 신효일체(信孝一體)입니다. 신앙과 효도가 한 몸입니다.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참 신앙은 먼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보이는 부모를 존경치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순복하고 존경하겠습니까? 절대 불가능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있습니까? 먼저 부모를 잘 섬기는 것으로 신앙을 보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그 때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행하는 옳은 일들이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날 한국 청년들에게 말씀한다고 한다면 너희 의가 옛날 유교도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으로 경고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이 사회가 어떻습니까? 종종 아들이 아버지를 때렸다는 기사가 나고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기사까지 나는 험악한 최악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극단의 예이지만 이런 얘기가 종종 들립니다.『그 아무 할머니가 요사이 얼굴이 말이 아니더군.』

『그것을 모르십니까. 그 할머니가 요사이 딸 때문에 너무 속을 상해 그렇습니다.』 이 가운데 아들이나 딸 때문에 속썩는 아버지 어머니가 혹 계십니까?

여러 청년들, 깊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내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는 못해 줄망정 속을 썩히지는 않았는지, 나 때문에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홀로 눈물이나 흘리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세요. 물론 이런 이들은 드물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부모를 등한히 여기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고의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주한 가운데 등한히 여기기 쉽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들이나 딸을 독일이나 미국 기타 외국에 유학 보내신 이가 많을 줄 아는데 자녀들을 외국에 보내 놓고 그 부모들이 항상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편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편지 잘 하는 아들과 딸들이 많이 있습니까? 별로 없을 줄 압니다.

여러분 중에 집이 시골에 있고 서울에 와서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꼭 기억하세요. 부모가 항상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편지 오기만 기다립니다. 편지 좀 자주 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구경을 가게 되면 부부끼리만 준비하고 나서는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쉽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아이들을 잘 보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잘 본다고 어머니를 아이 보는 유모로 알지 마십시오. 아이 보는 보모가 아닙니다.

부모님의 속마음도 좀 알아주십시오. 뭐 젊어서는 사업도 하고 교제도 하고 자연 용돈도 많이 쓰게 되고 외식도 많이 하게 되지만 나이 많아 은퇴하게 되면 뭐 용돈도 과히 많이 필요치는 않지요. 그러니까 어떤 자녀들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부모야 뭐 용돈 필요 있나 예배당에 가는데 십 원만 드렸으면 다 된 거지―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노인들도 혹 용돈 쓸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들이나 딸이라 할지라도 용돈을 요구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런 사정을 아십니까? 그러기에 우리 한국 속담에「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이 내 주머니 돈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꼭 쓸데가 있어서 말하기 전에 넉넉히 드리세요. 요사이 해방된 후 온 세상이 한 집처럼 교통하니까 해방 전에는 먹지 못하던 음식도 많이 먹습니다. 코카콜라 같은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 부모들은 옛날 사람이 되어서 이런 것은 잡술 줄 모를 거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들은 잘 먹이면서 부모들에게는 사드릴 생각조차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모님을 보고『이것 잡숫겠습니까?』하고 물어 보면『얘 너희나 먹어라 우리는 먹을 줄 모른다.』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걸 곧이 들으니 탈입니다. 여러분, 나이 많아도 입맛은 변치 않습니다. 자꾸 제가 잔소리를 하는데 저로서는 많이 생각하고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여기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이런 얘기는 목사나 대신 해주셔야지 다른 사람은 얘기해 줄 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심정인 것 같습니다. 등한히 여기지 마십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를 높인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부모를 어떻게 보든지 우리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높입시다. 어떤 분은 자기 아버지를 가리켜「우리 집 영감」이니「우리 집 늙은이」니 하고 부릅니다. 그것은 겸손(謙遜)이 아닙니다. 어떤 얘기 가운데서라도 우리 부모를 내가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효도의 제일 첩경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부모가 기대하는 사람이 되고, 부모가 기대하는 사업을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정에서 부모를 잘 순복하는 아들이 되었더니 그 후 불행하게도 멀리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거기서도 종으로서 잘 순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불행하게도 교도소에 들어갔지만 교도소에서도 잘 순복하는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총리대신이 되어 자기 아버지를 수십 년만에 다시 맞아 들여 그를 크게 기쁘게 하고 영광을 돌린 사실을 우리가 창세기에서 읽어봅니다.

여기 구약을 읽어보면 룻기가 있는데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천대하는 모압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압 여자의 얘기가 성경에 들어갔습니까? 비록 룻은 이방 여자이지만 외롭게 된 시어머니를 긍휼히 여기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위로해 주고, 고독하게 홀로 보내기가 애처로워서 멀리 베들레헴까지 오고, 먹을 것이 없을 때 곡식 이삭을 주워 봉양해 드렸습니다.

절세(絶世)의 효부올시다. 그래서 그 얘기가 성경에 들어왔고, 룻은 축복을 받아서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부모를 잘 공경하라는 말을 들을 때에 혹 마음속으로 고민하시는 분아 계시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젊은 부부가 제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제 아버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올시다. 고집이 옹고집입니다.』또 몇 주일 전에는 어떤 지방의 고등학교 여선생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홀 어머님 밑에서 잘 자라서 공부를 다하고 이제는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우리 어머님 성질이 어찌나 이상한지 우리 둘이 마주 앉아 얘기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제가 이 젊은 부부들이 부모님께 당하는 문제들을 충분히 알고 양해합니다. 사실 그런 부모가 계시면 좀 고치십시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제가 부모님들에게 설교를 안 합니다.

자녀들에게 합니다. 좀 바꿔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가 우리를 잘 길러 이만큼 살게 되었는데 우리들이 아이 때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아이들이었다고 확신합니까? 제가 전에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이런 우스운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첫 아기를 낳아서 안고 와서 아기 좀 보세요―하고 자랑삼아서 자기 앞에 내놓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처음 보니까 아기가 못 생겼드래요. 그러니 못생긴 것을 잘 생겼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고, 또 못생긴 것을 못생겼다고 하면 섭섭해하겠고 해서 그저 한다는 말이, 아 거참 베이비로군―했답니다. 베이비란 말은 아기란 뜻입니다. 사실 그대로지요. 아기야 아기지 뭐 다른 것 될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그 아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잘 못생겨 보였으나 어머님에게는 잘 생겨 보였단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왜 그런고 하니 어머니는 그 아기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랑의 눈으로 볼 때에 그 아기가 잘생겨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속담에「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반질 반질 하다.」고 한다지 않습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곱게 보였단 말입니다. 성질이 별난 아이도 있고 말 안 듣는 아이도 있고 별에 별 아이가 다 있지만 그래도 부모는 기쁨으로 모든 것을 참으면서 잘 길러 주어 우리가 다 청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장성하고 부모가 늙으면 그것이 다 바꾸어집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잘 길러 주었으니 이제는 우리도 부모들에게 부족한 것이 보여도 사랑의 눈으로 보아서 부모를 잘 공경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고「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했습니다. 해방 후 대학이 많이 생겨서 대학생도 많이 있고 또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끼리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다른 것은 괜찮은데 너무 무식해서 탈이야. 사실 이력서를 보면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거든요. 시대가 변한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아버지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그대로 다 할 재간이 있어야지?

여러분, 학교 교육만이 교육이 아닙니다. 사회의 교육이 있습니다. 실제 사회에 나가서 십 년을 바로 살면 그 십 년간의 사회 교육은 대학 사 년간의 교육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험을 통해 산지식을 얻습니다.

더욱 예수 믿는 부모님들은 예수를 십 년만 믿으면 예수 안 믿는 대학 졸업생보다 다 낫습니다. 왜? 교회 교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육이 좀 부족해도 부모님의 말씀을 순복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비록 자기 잘못을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교훈을 합니다. 부모의 명령을 거스릴 수밖에 없는 오직 한 가지 경우가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가 예수를 믿지 못하고 하나님도 몰라서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되는 명령을 내릴 때입니다. 그 때는 부득이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에는 부모님의 말씀을 존중함이 마땅합니다.

여러분, 홍수 후에 노아가 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 포도주를 너무 많이 먹고 취해서 벌거벗고 잤습니다. 아들 함이 그걸 보고 그냥 나갔습니다. 동생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샘과 야벳이 옷을 갖고 뒷걸음쳐 가서 하체를 보지 않고 아버지를 덮어 주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함은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부모가 좀 부족해도 효도를 극진히 하는 이가 축복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오. 이 계명은 시간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모들은 항상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건강하게 보여도 나이 많으면 언제 세상을 떠날는지 모릅니다. 세상 떠난 후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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