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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3:18-고전4:5/그리스도인의 충성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59:37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四․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二․十) 성경 가운데 충성에 대한 교훈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몇 절을 봉독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품격에 대한 교훈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충성에 대한 교훈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충성이란 말의 성서적인 근본 뜻은 믿음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신실, 성실, 신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은 충성된 사람입니다. 「충성」은 하나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종종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심으로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 후서 二장 十三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언약을 지키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二十一장 四十五절에『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미쁘심으로 그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十三장 五절 이하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하나님은 충성되십니다. 「미쁨」즉,「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으로서 그리스도의 품격의 기본적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을 만하신 것과 같이 그의 자녀된 우리도 남이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아무리 재주와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이 충성의 요소가 그 성경에 결여되면 그는 쓸데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을 골라 기름을 붓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 용모와 신장을 너는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이 무엇입니까? 충성인 것입니다. 관청이나 회사나 공장이나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인물을 채용하려고 하면 흔히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그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가 잇느냐? 둘째는 그가 믿을 만하냐? 다시 말해면 그가 충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문제는 그의 재능 또는 전문적인 과목에 따라고 작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조건을 구비하였다고 할지라도 둘째 조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채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현재의 한국 실정은 지식인과 기술자는 상당히 양성된 것 같습니다. 문제는 기수로가 지식이 있는 동시에 충성된 사람이 얼마나 잇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각분야의 부정과 부패로써 이 사회를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부정 약품이 나옵니까?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충성된 사람이 부족해서입니다. 왜 부정한 제품이 나오느냐?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충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기와 횡령이 이렇게 많으냐? 머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충성되고 진실된 사람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 교육의 가장 큰 결함 가운데 하나는 지적 방면에 치중하고, 이 덕육(德育)방면에 등한히 하는 일입니다. 학교 당국 자체가 종종 부조한 일을 합니다. 이 품격을 무시하고 머리 좋은 학생만 받는 현대의 입학제도부터 신중한 재고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기꾼 소매치기 등 지능범들은 머리가 제일 좋습니다. 전에 의산노회의 원로 목사로서 덕이 높은 최 명준 목사님을 아시는 분이 많은 줄 압니다. 그 목사님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한 번 해주셨습니다. 사람을 택할 때는 늘 두 가지 면을 보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이 충에 속하느냐? 간에 속하느냐? 재주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간에 속하는 사람을 택하다가는 실수하기 쉬운 것이다. 재주는 좀 부족해서 충에 속하는 사람을 쓰는 것이 실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내보니 꼭 그렇습니다. 충성은 그리스도인의 품격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다 재능과 지식과 기술에 탁월할 수는 없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의 은사는 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충성된 남편, 충성된 아내, 충성된 아버지, 충성된 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가서는 충성된 직공, 충성된 회사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 있으면 충성된 선생들과 충성된 학생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현 사회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더 믿어줍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믿음의 보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진실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생활하도록 힘을 씁니까? 현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러하고 우리 학교가 그러하고 우리 관청이 그러하고 우리 회사가 그러하고 우리 상점이 그러하고 우리 교회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자녀들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 충성에는 세 가지 시금석이 있습니다. 세 가지 방면으로 충성을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양의 시금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일로 네게 맡기리라.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이가 큰 일에 충성합니다. 여기 혹 관청에 다니는 이 가운데 말단 공무원이 있다고 하면 내가 국장이나 장관이 되면 더 충성해 보겠으나 나 맡은 적은 일에 대해서야 되는대로 해도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단 공무원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이 다음 국장이 되고 장관이 되어도 충성하게 됩니다. 혹 우리 교회에서 내가 장로나 권사가 되었으면 충성하려니와 지금 반사와 같은 적은 직분을 맡았으니 이거야 형편대로 해도 괜찮 치 않겠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적은 직분을 맡아서 충성하는 이가 큰 직분을 맡을 때에 충성합니다. 젊었을 대는 흔히 적은 일을 하나님께서 맡깁니다. 그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도, 또 하나는 그 사람의 충성됨을 보고 나서 장차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적은 의무가 있습니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서 또 저녁에 잘 때에 기도하는 것 같은 적은 것 말입니다. 혹은 매일 성경을 읽는 것, 주일을 거룩이 지키는 일, 혹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 등은 다 적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적을 일에 충성된 사람이 큰일을 맡을 때에도 충성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총리대신의 직분을 맡기었고 또한 그 자리에서 충성하였습니다. 다윗이 베들레헴 목장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서 충성하더니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웠고, 그 왕의 자리에서 충성되게 자기의 책임을 감당한 것입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이가 큰 일에 충성하고 적을 일에 충성하니 하나님께서 큰 일을 맡기십니다. 둘째는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 충성하기는 쉽습니다. 며칠 동안 충성하기는 쉽습니다. 혹은 몇 해 동안도 충성하기 쉽습니다. 요컨대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十二제자 중에 가룟 유다 같은 이는 우리가 다 반역자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이가 한 二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면, 아마 충성된 제자라고 우리가 생각할 것입니다. 三년만에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도와주던 젊은 사람 중에 데마 같은 사람, 아마 몇 해 후에 죽었던들 좋은 사람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세상을 사랑해서 선생을 배반하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우리 동양사의 전한 후한을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그 한나라가 왜 전한 후한이 되었는지 압니까? 그 사이 왕명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三十년 동안 충신으로 알려졌습니다. 三十년 후에 역적이 되었습니다.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 아브라함과 같이 끝까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느냐? 혹은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끝까지 충성하느냐? 일년 혹은 二년, 三년 충성하기는 쉽습니다. 二十년, 三十년 동안 충성은 어떻게 합니까?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북한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잘했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셋째는 환경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성한 여름날, 그 때에는 송죽의 절개를 모릅니다. 소나무나 대나무의 절개를 몰라요. 그러나 엄동설한이 올 때에, 백설이 건곤에 차게 될 때에야 송죽의 절개가 나타납니다. 옛날부터 집이 가난할 때에야 어진 아내를 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신의주에 있을 때에 갑자기 중한 병자가 생긴 어떤 집을 가보았습니다. 가보니 연기가 자욱한 조그만 방에 한 五十된 이가 병이 나서 누웠는데 폐병 三기로서 거의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방을 들여다보니 七, 八세 된 아이가 불을 때고 있는데 살펴보니 다리 하나가 없게 없습니다. 그 주인은 나를 보더니 하는 말이 자기가 병들자 아내는 멀리 달아나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여자도 있습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분도 있습니다. 남편이 혹 세상 떠난 후에 또는 남편이 六․二五때 납북된 후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밤과 낮으로 수고하며 일해서 어린이들을 잘 기르고 가르쳐 주어서 아버지 있는 아이들보다도 더 좋은 아이로 길러 놓은 어진 아내 어진 어머니가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집이 가난할 때에 특별히 잘 나타납니다. 이 때에 어진 아내, 어진 어머니 현모양처가 나타납니다. 옛날부터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어진 양상(良相) 어진 재상들을 생각한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고려조가 다 무너져서 넘어지게 될 때에 정 포은 선생 같은 이의 충성이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침노해서 팔도강산이 그야 말로 풍전등화같이 되었을 때에 이 충무공 같은 이의 충성이 나타났습니다. 교회에서도 六․二五와 같은 어려운 일을 당해서 붉은 세력이 이 땅을 휩쓸게 될 때에 김 응락 장로와 같은 충성된 신앙이 나타났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충성이 나타납니다. 교회에 큰 핍박이 있을 때에,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할 때에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충성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맡은이의 구할 것을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재능이 있습니까? 지식이 있습니까? 이것도 하나님께 맡은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 재능에 대하여 우리가 이 시간을 어떻게 씁니까? 우리에게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을 어떻게 씁니까? 우리에게 무슨 물질이 있습니까? 많거나 적거나 이 물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어떠한 청지기 노릇을 합니까? 꼭 하나님의 뜻대로 씁니까? 우리는 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에 대한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간수하고 이 진리를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떠한 청지기 노릇을 합니까? 혹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직분을 맡은이들도 계십니다. 이 직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맡은 자에게 충성을 기대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맡은 자에겐 언제든지 한 번은 시험할 때가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여러분이 다 기억하십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른트 각각 종에게 맡기고, 오랜 후에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셈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열심히 장사해서 그만큼 씩 더 남기어 주인 앞에 가져왔습니다. 주인이 하는 말이 착하고 진실한 종아,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 일로 맡기겠다. 들어와서 재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온 종에게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맡은 사람이므로 마지막으로 한 번 주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작년에 어떤 교회의 장로 안수 식에 참석하러 갔었는데 장로 안수를 받는 이가 디모데 전서 一장 十二절을 인용해서 답사를 했습니다. 거기 무슨 말씀이 잇느냐 하면『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든지 크든지 무슨 직분을 맡기실 때에는 우리를 충성 되이 여겨서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주님의 기대에 대해서 어떠한 보답을 합니까? 사실 교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은 이런 의식을 가진 충성된 교인들, 충성된 장로들, 충성된 집사들, 충성된 일꾼들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이만한 은혜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이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받은 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골고다 언덕길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시고 최대의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계시록을 통하여『죽도록 충성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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