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9:1-13/ 신앙심과 동포애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48:37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九․一-三)

우리는 바로 어제 열 아홉 번째 광복절을 맞이했습니다. 과거 十九년간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 다시 말하면 三八선, 六․二五, 四․一九, 五․一六, 최근 六․三사건 등을 회고할 때에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민족의 장래를 전망할 때에 또한 인중도원(人重道遠)의 감, 즉 짐은 무겁고 길은 먼 느낌이 솟아오릅니다. 아직도 허다한 난관을 돌파하여야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자유와 번영의 민주 건국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 이러한 땅에 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각오와 사명이 과연 무엇일까 에 대하여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一절부터 三절을 다시 봉독(奉讀)합니다.『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글을 쓰신 분은 사도 바울 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성구 가운데서 그의 신앙을 찾아봅니다. 그가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지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이 글귀 가운데서 그의 애국심을 또한 살필 수 있습니다.

먼저「그리스도 안에서…」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혹은『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하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말을 했습니다.

참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속(代贖)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믿는 것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영적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성령 안에서 생각하며 말하며 행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점을 강조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에『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리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가 없으리라.』또는『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어 주시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는『이것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빌립보서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또는『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곧 그리스도안에서)내가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이렇게도 외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두 차원의 세계에서 삽니다. 하나는 현실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동시에 영적 세계 곧 그리스도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차원에서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영적 차원에서 사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만 삽니다. 혹은 머리로 생각해서 그럴 것이라, 이지적으로 인정만 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은 다 필요하지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리스도의 입술로 말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족으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 말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신앙생활의 내용을 봅니다.

다음 二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한다.』 이 말씀은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영적 차원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도 바울은 근심과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주 안에 사는 우리에게 딴 근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 하고 기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큰 근심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또한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비록 영적 차원에 살면서 무한한 기쁨과 평화를 느끼지마는, 어떤 그릇된 신비주의자들과 같이 현실 세계를 잊어버린 분은 아닙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살지마는 이 현실 세계를 또한 내려다봅니다. 제일 먼저 자기와 가장 가까운 골육지친(骨肉之親)인 자기 민족을 내려다봅니다. 자기 민족을 내려다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근심이 생겼습니다.

고통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민족이 본래 어떤 민족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은 민족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은 통해서 났습니다.

아니, 육신으로 말하면 메시야 되는 그리스도도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났습니다. 열 두 사도가 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이 메시야가 오셨건마는 메시야를 보지 못합니다. 메시야를 알지 못합니다. 메시야를 맞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맹목적으로 눈을 가리우고 그리스도를 핍박합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 되는 교회를 그들이 핍박합니다. 이방의 전도를 방해합니다.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핍박합니다. 이렇게 죄의 양(量)을 이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문자 그대로 금생과 내생에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골육지친인 자기 민족이 이러한 암흑의 길로 나가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에는 큰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 마음속에 일어나는 고통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참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이런 근심은 있습니다. 이런 고통은 면할 수 없습니다.

전에 느헤미야 같은 이는 위대한 신앙 가였습니다. 물론 주안에서 큰 즐거움을 가진 분입니다. 그는 파사 궁중의 고관으로 있었습니다. 평안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어떤 분이 와서 고국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거기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가 되었고, 예루살렘의 성문이 다 불 살음을 당했다고 하는 비참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는 통곡했습니다. 금식하며 밤잠을 자기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도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런 문구를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슬프다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 하도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도다.』슬픔이 있었습니다. 근심이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사도 바울이 가졌던 참된 신앙을 마음 가운데 가졌습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눈으로 우리 민족을 내려다봅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한국의 현실을 직시(直視)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가슴에 무엇이 있습니까?

먼저 영적 견지에서 우리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서 이미 八十년 전에 선교사를 보내서 복음을 전파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축복을 주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을 감사합니다.

지금 듣건 대는 신구교도 합해서 우리 남한에 약 一五0만의 기독교도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남한의 인구가 三천 만이나 된다고 하는데 거기 비교하면 一五0만이 다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二十분의 一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직까지도 이 한국의 三천만 동포가 생명의 주를 모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없이 이 세상에 살고, 소망이 없이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우리가 사실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압니까? 우리가 사실 우리 인간의 영적인 운명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믿습니까? 그러면 날로 소망 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이 동족을 우리가 어떤 눈으로 봅니까? 우리 마음에 근심이 없습니까? 우리 마음에 고통이 그칩니까? 더욱이 내 사랑하는 친척이 아직까지도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마음이 안심합니까?

또 한국의 현실을 직시하세요. 해방 이후에 적어도 우리 한국은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온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얼마든지 민주 건국의 기회는 있습니다. 자유우방의 막대한 원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 혼란, 이 빈곤, 이 불안, 이 혁명, 이 데모, 이 계엄령 같은 것이 계속됩니까? 대한민국을 좀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혹은 공산당, 혹은 모리배, 혹은 부패한 정치가, 혹은 부패한 군인들, 혹은 부패한 공무원들,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인지 압니까? 우리의 죄악입니다. 대한민국의 각계 각층,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을 좀 먹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어떻게 이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까? 천사가 말하기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이 예수를 모르고 삽니다. 예수 님께 나오지를 않습니다. 살길이 있어도, 살길을 찾지 않고, 멸망의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실 민족을 위한 이 안타까운 심정과 고통과 근심은 신앙의 척도인 줄 압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에 들어갈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 알수록, 우리가 영적 세계를 분명히 볼수록, 내가 내 민족을 더 사랑할수록 이 근심과 고통은 더하여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께서 깊은 신앙 가운데 우리 민족을 살필 때에 우리 민족의 심령을 위해서,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머뭅니까? 만일 이런 것이 없다고 하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반성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의 신앙은 큰 근심을 가져왔고 큰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근심과 고통은 다만 근심과 고통에 멎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三절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치 않겠다는 사도 바울의 희생정신의 표현이요, 정의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이 원한다고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八장 마지막 절을 보면『내가 확신(確信)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하신 이 말씀은 다만 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나로서는 어떠한 희생이라고 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각오가 있습니까? 모세도 이 비슷한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고 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에, 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 이름을 생명 책에서 도말하여 주시옵소서.』

같은 정신을 나타낸 애국자 모세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자 죤 낙스(John Knox)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시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Give me Scotland or I'll die.)』

다 같은 정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참 신앙 가이며 참 애국자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실행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돌에 맞아가면서도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골육지친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교회가 큰 기근을 당할 때, 이방교회에서 연보를 거두어서 그들을 구호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핍박을 받고 죽으리라고 하는 경고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경고대로 그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붙잡혀서 오랫동안 옥고를 당했습니다. 마지막에 순교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이와 같은 결심과 희생의 정신으로 살고 또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참 신앙이 있습니까? 우리가 참 신앙의 견지에서 우리 민족을 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도 고통이 있습니까?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이와 같은 고통이 있은 즉 이 민족을 영적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이라도 하겠다는 정신과 결의가 있습니까?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도 위대한 애국자입니다. 먼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여러 문도들을 전도하려 내보내면서 이방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제일 먼저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三년 동안 계속해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 다니며 전도하시다가 그래도 이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派送)된 다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슬픈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습니다.

그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십니까?『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자기 민족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애국심은 어디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 가운데도 위대한 애국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애국심을 순화하고 정화하고 또 뿌리를 깊이 박습니다. 애국심이 잘못되면 배타주의로 변하기도 쉽고, 민족지상주의로도 변하기 쉽고, 국가지상주의로도 전락하기도 쉽습니다.

혹은 파쇼주의, 혹은 독재주의로 애국심이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타락을 막으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 아래서 나라를 사랑하는 건전한 애국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을 지도해야 합니다.

또 기독교 애국심은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든지 민족의 제일 큰 원수가 죄라고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때의 이스라엘 민족의 제일 큰 원수가 로마 사람인 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의 제일 큰, 원수는 너희 속에 있는 죄라고 하시며 먼저 이 죄를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애국심은 언제든지 먼저 죄를 회개하게 하는 이 복음전파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애국심이 거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 애국심은 또한 그 민족을 역사적 현실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에 참여할 수밖에 없고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 자유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노력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애국자들이 어떠한 사회에 있든지, 어떠한 정권이나 어떠한 정당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비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바로 할 때에 격려하고 협력해 주며, 그릇된 길로 나갈 때에 경고하며 부득이 하면 항거하여서라도 자기 나라를 바로 세우도록 힘씁니다. 이것이 기독교 애국자의 할 일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언자들이 국가에 대하여 드린 봉사의 길인 것입니다.

제일 귀한 것은 참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게 될 때에 우리에게 근심이 들어옵니다. 세상 근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근심이 들어옵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근심이 들어옵니다.

이 근심이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하는 희생정신에까지 미칠 때에 이것이 참 신앙생활이 됩니다. 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시간을 희생하고, 내 재주를 희생하고, 내 물질을 희생하고, 부득이 하면 생명까지라도 희생하고자 하는 이 정신이 참 신앙이요, 이것이 참 애국자의 신앙입니다.






admin

�씠�쟾�쑝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