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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36-47/ 사도시대의 전도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28:48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二․三十六)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선교의 결론입니다. 오순절의 큰 은혜를 받아서 방언을 말하며 기쁨이 충만하게 될 때에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기 위하여 그 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사도 베드로는 열 한 사도와 같이 일어나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먼저 이와 같은 현상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과 같이 무슨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으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마는 이 십자가의 죽음도 결국은 성경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 과연 이 분은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주가 될 수 있는 것을 증거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구주가 되는 것을 오순절에 확증한 것입니다. 이 설교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맨 처음의 설교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이 설교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특별히 一년에 한 번 전도부 주일로 지키는 날을 맞아 사도시대에는 전도를 어떻게 하였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용히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간단하게 말하여 세 가지 방법으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말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입을 벌려서 말로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예수의 부활을 또한 증거 한 것입니다. 앞서도 말하였지마는 사도『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이렇게 사도행전 二장에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뿐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게 될 때에 역시 입을 벌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스데반 뿐 아니고 사도 바울도 루스드라회당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혹은 아덴에 가서 아레오바고 산상에서 많은 철학자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 할 때에, 혹은 가이사랴에서 베스도와 아그립바왕 앞에 섰을 때도 한결같이 입을 벌려 말을 통해서 예수 님께서 구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한 것입니다. 이런 전도는 일시에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는 말씀인 까닭으로 대중전도 혹은 공중전도라고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말로 전도하되 다른 형식의 전도가 있었습니다. 가령 빌립이 가이사랴에 가서 전도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전도한 것보다도 개인 개인을 접촉해서 전도한 것 같습니다. 길 가다가 구스 여왕 간다게의 배부장관이 지나가는 것을 만나서 수레를 같이 타고 가면서 이사야를 해석해 주어 개인으로 전도한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사람 앞에서만 전도한 것 아니고 집집에 다니면서 전도를 했고 또한 거리에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는 대로 개인으로 전도를 한 것입니다. 말로 한 전도 가운데 공중전도뿐이 아니고 개인전도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도 이 두 가지 방법을 병용했습니다. 산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산상보훈을 가르친 것은 말하자면 대중에 대한 공중전도입니다. 혹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를 가르치신 것도 역시 일시에 수천 명에게 한 공중전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저녁은 조용히 니고데모 라고 하는 한 사람을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 하나는 만나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삭개오 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조용히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정을 읽어보면 대중전도뿐 아니고 이와 같은 개인전도를 통해서 복음이 각처에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명 전도자가 안디옥에도 먼저 가서 교회를 세웠고, 무명 전도자가 오라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생명 책에만 이름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개인 개인의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사방으로 전파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의 전도를 보충하기 위해서 또한 어떤 이가 글을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가령 마가 같은 이는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 님의 생활과, 그 교훈을 기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읽게 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누가는 누가복음, 요한 은 요한 복음을 썼고 또 사도 바울도 여러 교인들에게 이미 가르친 것을 더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도시대에 이미 문서전도가 시작된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에 보면 말로써 전도를 했는데 공중전도, 개인전도, 문서전도 이 세 가지 방면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보면 문화가 발전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말의 전도를 보충하는 여러 가지 기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확성기,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것이 다 우리말의 전도를 도와줍니다. 인도에 있는 말호마교회 같은 데는 一년에 한 번씩 온 교인들이 다 모여서 대회를 여는 풍속이 있는데 한 번에 三, 四만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전에 확성기 없을 때에는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크게 설교를 한 마디 하면 멀리 그 말을 들을 만한 곳에 선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또 전해 주고 이렇게 해서 여러 만 명에게 일시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확성기가 나온 이후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라디오를 통해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마는 일시에 전국에 혹은 세계에까지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지금은 멀리 있는 사람에게 얼굴까지 보면서 전도를 할 수 있는 텔레비전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시대와 환경은 변하였지마는 지금도 이 전도는 우선 말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중으로 전도해야 되겠고, 문서로 전도를 해야 되겠고 대중으로 전도를 해야 되겠고, 개인 개인이 만나서 또한 말로써 전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몇 가지 방법 가운데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제일 편리한 전도방법이 어느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개인전도입니다. 전도하는 것을 전쟁에 비유하면 문서전도나 방송전도 같은 것은, 마치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서 그 나라를 점령하고자 할 때, 비행기를 보내서 폭격하는 것, 혹은 군함을 보내서 함포(艦砲)사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먼저 문서전도나 방송전도를 통해서 기독교 진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쟁에서 공군기의 폭격 만으론 온전히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폭격을 다 하고, 함포 사격을 다 한 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압니까? 육군이 있어야 합니다. 보병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 원수의 영토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해야 완전히 전쟁에 승리를 얻습니다. 여러분, 개인전도자는 무엇과 갔느냐고 하면 육군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종종 등록하는 이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방송을 통해서 진리를 듣고, 혹은 책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어떻게 되어서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까?』 물어보면『아무 집사가, 아무 권찰이, 아무 친구가 나보고 오자고 그래서 이제 교회에 왔습니다.』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때는 별로 공부도 못한 이가 대학교수를 인도해 가지고 우리 교회에 나온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문서전도나 방송전도나 대중전도가 필요하지마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개인 개인으로 하나씩 하나씩 인도하는 개인전도입니다. 사도시대는 하나 하나가 개인전도자였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곧 자기 형 시몬을 예수 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빌립이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곧 자기 동향 사람 나다나엘을 예수 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찬송가에 있는 말씀이 꼭 옳습니다.『천사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사도시대 교인들은 하나 하나가 개인전도를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자였습니다. 둘째로는 행위 혹은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말로 하는 전도가 물론 필요하지마는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말과 행위가 같아야 됩니다. 어떤 때는 말은 잘하지마는 그 사람의 행위가 말과 같지 않음으로 인해서 아무리 잘 한 말이라고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해서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착한 행실은 무언의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 큰 감과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면, 아마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 논리에 의해서 과연 예수 님께서 메시야다 이렇게 깨닫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이 위험한 자리에서 담대하고 용감하고 침착하던 스데반의 모습, 자기를 죽이려고 돌로 치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하오니 이 사람들의 죄를 그 머리에 돌리지 마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던 그 모습을 잊을 내야 잊을 수 없었을 줄 압니다. 무언의 전도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四장이나 五장을 읽을 때에 대 제사장과 그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불러다 놓고서 왜 이 복음을 전파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그냥 복음을 전하느냐고 힐난했을 때에 이 사람들이 담대히『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입니까? 사람의 말을 순종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고 한 것을 읽어봅니다. 공회원들이 본래 생각하기는 이 사람은 다 갈릴리 어부요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사람들로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가 하고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 무언의 전도입니다. 초대교인들의 진실하고 성결하고 실천적인 사랑의 생활은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병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병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병이 나아서 깨끗함을 얻은 이런 모든 일도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혹은 욥바의 다비다와 같은 여자가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일생토록 봉사의 생활을 한 것도 온 욥바 근처에 무언의 전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우리 믿는 사람의 행위와 행동이 무언중에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은 진실하고, 성결하며 사랑과 봉사로써 무언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참 이와 같은 행위와 행동으로써 무언의 전도를 하는 분이 많이 있는 것을 저는 항상 감사히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 부(部)가 다 교회를 봉사하고 전도를 잘 하지마는 아마 이런 방면으로 전도를 많이 하는 부는 상례 부나 봉사 부나 혹은 각 구역을 맡은 권찰 들일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에 가서 같이 위로해 주고, 같이 눈물을 흘리면 옷을 지어 주고, 모든 수속을 도와주고, 같이 모여서 정성껏 장례식을 치려주고, 산에까지 같이 가소 가 다음에 또 가서 위로하는 이런 모든 것은 무언중에 다 전도가 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마련해 주고, 밥 굶는 사람에게 쌀을 마련해 주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피차에 도와서 직업을 알선해 주고, 피차에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은 다 무언 중의 전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자선사업기관들이 하는 일도 다 무언의 전도가 됩니다. 교육사업이나, 의료사업이나, 자선사업이나 이 모든 것도 그 자체를 위해서 하려니와 이것 역시 무언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네팔 같은 나라에는 지금도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잘 믿는 의사들이 가서 병을 고쳐 주면서 개인으로 전도를 현재 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잘 믿는 의사가 그의 의료사업을 통해서 복음을 많이 전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의 행위와 행동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유명한 이야기를 우리가 항상 기억합니다. 한 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아시스 거리를 한 바퀴 빙 돌아오면서 아무라고도 말 안하고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오늘은 왜 시간만 버리고 전도도 하지 않고 그냥 거리만 돌아왔습니까?』 이 때 성 프랜시스는『말로 하는 전도만 전도인줄 알지 말라.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걸어가는 행동 그 자체가 무언의 전도인 것을 너희들이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행위로써 전도를 했습니다. 셋째로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다 이 성경 본문을 읽었지마는 그 가운데 제가 몇 절을 다시 읽을 때 그 당시 교회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런 몇 구절이 그 때 교회생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들은 다 사도의 그르침에 순복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도의 교제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유무를 상통하고 상부상조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항상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들은 항상 같이 모여서도 이따금 떡을 떼어먹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찬식, 혹은 친목회를 자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기도를 힘썼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생활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이렇게 되니 자연히 구원받을 사람이 구름같이 교회로 모여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생활 자체가 복음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화평과 사랑과 기쁨과 경건의 교회생활, 동고동락하며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생활은 언제나 큰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화평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한 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유감이지마는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이 방면에 실패한 점이 많습니다. 이 방면에 특별히 반성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 때의 예루살렘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되었습니까?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오순절의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와 같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이들이 어떻게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나 요?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의 믿음과 기도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 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보고 예수의 부활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이 교회로 하여금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 하나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를 개인으로도 전파했고, 교회로도 전파했고, 말로도 전파했고, 행위로도 전파했고, 생활로도 전파할 수가 있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지상명령입니다.『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은 예수 님께서 최후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 명령한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살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의 살길도, 민족의 살길도,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도 복음을 믿는 데 있고, 이 썩어져 가는 사회를 구할 길도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반공과 방첩의 표어가 사방에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어를 붙이기만 한다고 반드시 반공이 되고 방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사상이 변화해서 과연 참된 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고, 참된 인생관을 바로 가지게 될 때에 자연히 반공의 생활을 하고 방첩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한에는 큰 전도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열린 문을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먼저 말로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로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교회생활로써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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