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1-11/ 양심의 소리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43: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八․七)

이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칠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하나 끌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거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 그 여자를 용서하라고 할 것이면 예수는 모세의 법을 범한다고 고소할 수 있습니다.
또 돌로 쳐라 할 것이면 예수는 사랑이 없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고 또 그 때의 로마법에도 유대 사람은 누구를 죽일 수가 없었음으로 로마법에 저촉된다고 고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예수는 그 뜻을 아시고 곧 대답하시지 아니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잠깐 머리를 숙이시고 땅을 보시더니 땅에 무슨 글자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얼른 대답하라고 성화같이 재촉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예수 님께서는 머리를 조용히 드시고 조용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쳐라.』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머리를 들고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다 떠나가고 그 여자 홀로 남았습니다. 예수 님은『너를 정죄(定罪)하던 자들이 다 어디 있느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서 슬며시 다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九절을 읽어보세요.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이들이 돌아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귀합니다. 이 시간 양심의 소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이요 하나는 양심입니다. 이성의 역할은 머리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이치를 추리하고 새로운 것은 착안하여 모든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의 역할은 간단히 말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배에서 쓰는 나침반(羅針盤)의 역할을 합니다. 배속에는 나침반이 있어서 배의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의 가슴속에서 도덕 생활의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 의와 불의를 분명하게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二장 五十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양심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고 말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도 산상 보훈에 말씀하시기를『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지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눈은 마음의 눈 곧 양심을 가리킨 것이 분명합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이 있는 지성소올시다.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지성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양심의 역할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학교로 말하면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더러 옳은 대로 하면 우리를 칭찬해 주고 그릇된 길로 가면 우리를 책망해 줍니다. 채찍질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 해서 양심의 지도대로 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지 아니할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불안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공회에 잡혀가서 많은 굴욕과 매를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매는 맞았으나 양심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三十냥의 돈을 받고 자기 주님인 예수 님을 팔았습니다. 유다가 그 돈을 가지고 집을 잘 짓고 안일하게 살았습니까? 그 돈을 도로 갖다가 성전 뜰에 던지고 마지막에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왜? 양심의 채찍을 맞은 것입니다.

사실 양심의 채찍을 안 맞는 분이 별로 없는 줄 압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양심의 법정에서 정죄를 받습니다. 혹 세상의 법정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법정은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소리는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반드시 순복(順服)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생활을 돌아보든지 사회의 현상을 돌아보면 사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저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세상은 양심이 다 썩어진 세상입니다. 이런 말도 들립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세밀한 소리는 듣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전화를 받다가 옆에서 라디오나 다른 것의 큰 소리가 나면 전화 소리가 안 들리지요, 큰 소리 대문에 멀리서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다윗 왕도 궁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고 스스로 기뻐했습니다. 그때 어떤 여자의 목욕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에 그의 마음에는 정욕의 불이 붙었습니다.

당시 왕의 권세는 못할 일이 없을 때입니다. 곧 그 여자를 불러다가 추행을 감행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의 충복, 우리야의 아내인 바세바였습니다.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야를 암몬 사람과의 전쟁터에 보내라는 밀서를 이스라엘의 사령관인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되어 그는 죽었습니다. 좋은 왕이었으나 이런 일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도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양심의 소리는 몇 번이나 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왜?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의 사자 나단이 찾아와서 다윗에게 아룁니다. 『어떤 성에 한 부자와 한 가난한 사람이 사는데 부잣집에는 양도 많고 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사람의 집에는 조그마한 암 양의 새끼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양을 자기 딸처럼 사랑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아주 귀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암 양을 빼앗아 잡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임금님은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윗은 노해서 그런 사람이 내 나라에 있을 수가 잇느냐 당장 죽여 마땅하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에 나단은 손가락으로 왕을 가리킵니다. 『대왕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하나님께서 대왕을 사랑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 맡기고 이 나라를 다 맡기고 모든 영광을 다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까.』

그 때에 다윗은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정욕뿐이 아닙니다.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물욕도 그렇습니다. 옛부터 우리 동양에는 황금이 흑사심(黃金黑士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른 금이 선비의 마음을 새까맣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양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말합니다. 우리 대한 민국에 제일 큰 원수가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산당이요 하나는 부정 부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부정 부패를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항상 애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그냥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고위층에 올라갈 수록 단수가 높다는 말입니다. 나는 유도에만 단수가 있는 줄 알았더니 뇌물에도 단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서 의사 시험을 치르는 고시 과장이 어떤 사람이 七十만원의 뇌물을 보낸 것에 분개해서 그 뇌물을 검찰 국에 보내면서 고소를 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 대한 민국의 관리가 이 고시 과장처럼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면 한국 사회는 하루아침에 명랑해 질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강한 욕심을 경계하여 합니다. 정욕뿐이 아닙니다.

물욕뿐이 아닙니다. 권세욕이 그렇고 명예욕이 그렇고 온갖 욕심이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양심의 소리가 가슴에 있지만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순복(順服)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소리의 경고가 있지마는 계속해서 순복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하며 성경 디모데전서 四장 二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양심이 화인을 맞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몸에 화인을 찍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종을 가지고 있으면 그 종의 몸에다 자기 이름을 화인 찍었습니다. 그 화인을 치 면 살이 익어서 뜸장 처럼 되고 그렇게 되면 감각이 둔해져서 더운 것을 모릅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해서 듣지 아니하면 양심이 무디어져서 그 다음에는 양심의 소리가 분명해 지지 아니 합니다. 얼마 전에 들으니 어떤 타락한 교인이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처음에 술집과 댄스홀에 갈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몇 번 가니 괜찮더라고. 양심이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러기에 도둑질도 처음에 할 때는 가슴이 두군 거리지마는 몇 번하게 되면 그런 느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기는 여러 번 들으나 거절하면 그 후에는 들리지를 아니 합니다. 그뿐인 줄 압니까? 그런 상태가 점점 오래가면 양심의 괴로움이 없어질 뿐더러 오히려 그 악을 청하는 것이 잘 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단계가 옵니다.

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 교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예수를 핍박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에는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顚倒)가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회개하기 전에 그의 양심은 왜곡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옥에 잡아 가두는 것이 잘 하는 일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릇된 사상과 편견으로 그 양심이 왜곡되었습니다.

종교개혁사를 읽을 때에 놀랄 만한 일은 불란서에서 성 바오로의 날에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신교도 수천 명을 학살한 사실입니다. 그 때의 구교도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안 받았으며 잘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예수를 믿되 바로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릇된 사상과 편견으로 양심이 왜곡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차대전 때에 유대인 六백만을 학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뿐더러 잘 하는 것으로 히틀러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공산당의 양심입니다. 이들은 게릴라를 남한으로 보내서 무도한 양민을 학살하고 민족 상쟁(相爭)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은 뿐더러 잘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흰 게 검게 되고 검은 것이 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만도 못하게 됩니다. 마음속의 나침반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사람은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대 양심이올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이 대 양심의 화신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와 접촉할 때에 양심의 소리를 언제나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도무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 나와서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돌을 덜어서 저 여자를 치라는 말을 들을 때에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삭개오의 얘기를 다 알지요? 삭개오는 세리 장이요 큰 부자입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탐관오리입니다. 부정 공무원, 모리배, 축재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태연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 님을 만나게 되어 뜻밖에 자기 집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자기 집에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예수 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자마자『선생님 내가 내 재산을 팔아서 절반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습니다. 또 내가 토색(討索)한 것은 四배나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비뚤어진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매색으로 가는데 갑자기 길가에 빛을 비추어 부활하신 예수 님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불렀습니다. 이 때에 꿇어앉아 하는 말이『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예수 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사을이 변해서 바울이 되고 새로운 양심을 가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九장 十四절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깨끗케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써 죄 씻음을 받으면서 새 사람이 되고 그 때부터 맑은 양심을 가질 뿐더러 양심의 소리를 언제나 분명히 듣게 됩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간단히 하지요 제가 전에 신의주 제이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저녁 예배를 필하고 집에 오니 어떤 청년이 와서 나를 보자고 했습니다. 들어온 후에 사정 얘기를 들으니 이러합니다. 『내가 내 처남의 재봉틀을 몇 해 동안 그냥 썼는데 이제 돌려보내야겠습니다.』『어떻게 된 거냐?』하니

『내가 믿기 전, 몇 해 전에 어떤 상점에서 연말 대매출을 할 때에 처남과 같이 가서 물건을 샀는데 처남도 경품권 하나를 받고 나도 하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남이『그것 다 매부가 간수하시구려 하면서 주기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번호가 어느 것이 자기 것이고 어느 것이 처남 것인지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제비를 뽑았더니 처남의 번호로 재봉틀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타다가 썼습니다. 처남은 번호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 후에 재봉틀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처남이 묻기에 내 번호로 나와서 내가 가졌다고 대답하고 내가 쓰고 있었습니다.』이 청년이 예수를 만나게 되니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양심이 평안히 있을 때뿐입니다.

전에 한자(韓子)라는 사람은 가난해서 바구니에 밥을 먹고 바가지로 물을 떠먹고 팔을 굽히고 잔다고 할지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심이 평안한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은 양심의 평안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양심이 괴로우면 그 곳에 행복은 없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들어야 합니다. 어디서나 들어야 합니다. 어떤 방면에서나 들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를 보면 개헌 문제로 토론이 굉장한 모양입니다. 아마 우리 국민은 이 문제를 투표할 수밖에 없어요. 맑은 양심으로 투표를 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양심을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 전서 一장 十九절에『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을 떠나면 그 믿음은 파산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오세요. 양심의 소리를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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