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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22-35/ 인간의 기갈과 그 양식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37: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六․三十五) 예수님이 외치신 말씀이올시다. 인간의 깊은 속에는 여러 가지 기갈이 있습니다. 굶주려 하고 목말라 하는 욕구, 혹은 욕망이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여래는 이런 욕망들을 인간고의 원인이라고 해서 고통을 멸하기 위하여 모든 욕망을 억제하여야 되며 말살하여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인간의 깊은 기갈의 정당성을 인정합니다. 선도합니다. 만족을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인간의 심한 기갈에 만족을 주시기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시간 인간의 기갈과 그 양식에 대해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하나 하나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기갈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육신을 쓰고 사니 이 육신이 살기 위해서 빵에 대한, 먹을 것에 대한 기갈이 있습니다. 사실 육신을 쓰는 사람은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굶주린 때에 자연이 기갈이 심해집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회 안에 또는 세계적으로 관찰할 때에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이 인가의 기본적인 기갈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식생활 문제는 우리 사회 또는 세계적으로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못하므로, 혹은 가정에 혹은 사회에 혹은 국제간에 여러 가지 불상사가 일어나고 불온한 사상, 불온한 행동이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사실 사람이 음식을 너무 먹지 못하면 영양불량증에 걸립니다. 여러 가지 육체의 병에 걸리기 쉬습니다. 가정이 생활난에 부딪쳐서 여러 가지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목도합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신에 굶주린 대중을 위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벳세다 뜰에서 능력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 해는 점점 저물어서 온 백성들이 주리게 될 때에 예수 님께서는 오병이어(五餠二魚)로써 이적을 행하셔서 많은 배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넉넉히 먹고 살만한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넉넉히 생산된다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인간의 그 욕심과 이기주의 때문에 식량은 넉넉하지마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먹어서 병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먹지 못해서 병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 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다시 말하면 천국의 법칙과 그 정의가 우리 사회에 실현될 때에 결국은 이 먹는 문제와 입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엔들 굶주리는 동료를 생각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성탄 계절에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굶주리는 대중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시고 먹을 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주님이올시다. 인간은 이렇게 육신을 위한 기본적인 기갈 외에 다른 방면의 여러 가지 기갈들이 또 있습니다. 지식의 기갈이 그것입니다. 방금 중학교의 입학 시험 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이 기갈이 얼마나 심한가는 우리가 다 목도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에 대한 기갈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오도되어 소위 일류학교 병에 걸려서 이따금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은 실로 민망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지식의 기갈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인간은 이 지적 갈망으로 말미암아 과학을 발전시켰고, 문명을 창조하게 되었고, 원자력을 발견하게 되었고, 우주선도 발사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이 과학적 지식만이 과연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가, 이 지식이 과연 인간을 좀 더 선하게 만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근본적인 진리,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잠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신 말씀이 잇는 것입니다. 무지는 곧 죄라고 하는 헬라 사람들의 말이 있지만은 사실 많은 죄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지적 기갈에 참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또한 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기갈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사랑의 기갈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애욕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어서 지식에 대한 기갈이 있는 반면 인간은 또한 사랑하는 동물, 애욕이 있는 동물이어서 사랑에 대한 기갈이 그 깊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이 사랑에 얽히어서 살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며,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며, 친구를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데 인간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아무도 사랑할 줄을 모르고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면 그의 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사는 것은 곧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 큰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한 기갈도 선도되어야 합니다. 잘못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을 혹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을 것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일생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할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 『너희는 너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것이 첫째 되는 큰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른 것들을 사랑할 때에 사랑을 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만이 참된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받으려고 하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바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갈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기갈입니다. 일제 시대와 공산 사회에서 살아본 사람은 이 자유의 기갈이 얼마나 심하다고 하는 것을 다 체험하셨습니다. 일제 시대에 수 없는 애국 지사들이 고국을 등지고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의 황막한 들판과 미주에서 헤 메이었습니다. 왜? 자유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조국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생명을 바친 순국열사도 많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자유를 찾아서 위험한 삼팔선을 넘어온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는 페트릭 헨리의 유명한 부르짖음은 이 인간의 공통된 그 심령 속에 깊이 파묻힌 자유의 기갈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에 대한 기갈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부의 인권이올시다. 하나님께서 본래에 주신 기본 인권이올시다. 그런데 이 자유에 대한 기갈도 선도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잘못 씀으로 말미암아, 남용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그르치고 혹 나라까지 망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 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캐 하리라.』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탐구할 때에 그 자유가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주님만이 자유에 대한 참된 만족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기갈을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영적 기갈입니다. 영혼의 기갈입니다. 시편 四十二 편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渴急)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울꼬.』또 시편 六十三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이 마르고 곤핍(困乏)한 당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이런 구절을 읽을 때에 우리 보통 사람들은 다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도 이와 비슷한 체험이 있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깊은 속에는 누구나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는 영적 기갈이 잇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우리는 그 기갈을 알 수 없다』고. 우리가 밥이 그렇게 주요하지마는 어떤 사람은 밥맛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밥맛이 없는지 압니까? 병든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이 영적 기갈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했지마는 이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언제나 그 마음속에 공허(空虛)가 잇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탕자의 비유를 다 기억하십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해서 모든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남의 되지 치는 집에 가서 되지를 쳐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되지 먹는 팥 껍질을 먹고 되지가 자는 곳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때의 되지는 팥 껍질을 잘 먹고 잘 잡니다. 그러나 탕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팥 껍질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 이유는 되지는 되지 이나 탕자는 그래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하게끔 되기는 하였지만 고향이 있고 고향에는 그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종교 없이 다만 육체적 물질적 조건에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되지 와 같은 짐승으로 보는 순전한 유물론적 인생관입니다. 물론 이런 그릇된 인생관이 용납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이 영적 기갈이 있습니다. 이 기갈이 만족을 받아야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이 기갈에 만족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 내려온 심령의 양식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육신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건강이 유지됩니다. 힘을 얻습니다. 마음의 만족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령은 하늘로부터 온 영생의 양식이 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고 생명의 힘을 얻고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음식 맛을 아주 잃어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이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병세가 어떠냐고 물을 때면 급식이 벌써 그쳤습니다. 하는 말이 종종 들리는데 이런 말들은 다음 얼마 후에는 그 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말이 들립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심령도 이 생명의 양식에 대한 기갈이 적어진다고 할 것이면 그것은 그 심령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음식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생의 양식도 매일 먹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어떤 비가 많이 오는 주일날아침에 예배당에 오려고 집을 나서는데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가겠습니까? 그때에 자기가 대답한 말이 비오는 날은 밥도 안 먹는다든, 나는 가야 되겠다. 하고 왔답니다. 사실 이 생명의 야식은 비오는 날이나 해가 나는 날이나 언제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음식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하지만 보기만 해서는 배부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먹어야 합니다. 이 생명의 양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게 보이지마는 보기만 해서는 쓸데가 업습니다. 이 생명의 양식도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우리 속에 들어갑니다. 소화가 됩니다. 그 양분이 우리 혈액에 흡수됩니다. 그때에 우리의 육체가 힘을 얻고 우리 육체가 강건해집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멀리서 바라만 보지 말고 주님을 내 주심에 영접해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혈관 소에서 움직이게 될 때에 우리 영은 강건해지고 우리의 영은 힘을 얻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기쁨과 화평(和平)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밥에 굶주린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지식에 굶주린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자유에 굶주린 사람, 영에 굶주린 사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생의 깊은 기갈에 만족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께 나오면 그는 다시 주리지 아니하고 그 심령은 영원토록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우리 가운데 심령의 기갈을 당한 이는 없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나와서 주님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흡족히 받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의 양식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이 주님을 만나고 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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