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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9:1-12/ 예수와 인간고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26:1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九․三) 이제 다른 곳의 성경 말씀을 한 절 더 읽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올시다.『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이 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두 번째 읽은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十三장 四전과 五절이올시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모양을 보셨습니다. 눈멀고 가난하고 또 사고무친(四顧無親)해서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그 소경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인간고(人間苦)의 상징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행로에는 이러한 불쌍한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면서 소경 된 이 걸인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이 사람이 이렇게 나면서부터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혹은 자기 자신의 죄입니까?』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이 소경이 나면서부터 저렇게 불쌍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필연 어떤 죄의 값이라고 단정한 듯싶습니다. 사실 이것은 보통 그 때 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한 사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종종 볼 수가 있고 특별히 인도교나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소위 칼마의 법칙이라고 해서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지해서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은 큰 고난을 받는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올시다. 또 이 제자들은 이 소경을 보고 이론적으로 그 이유를 좀 더 분명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해서 이것이 죄 값은 죄 값인데 자기의 죄일까 부모의 죄일까, 즉 누구의 죄인지 이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의 생각이나 태도에 소경을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없고, 인생 문제를 연구하는 한 자료로서 본 것처럼 생각할 때에 유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으며 예수님은 어떠한 태도를 가졌으며 예수님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 잠깐 생각하기 원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여 주셨습니다.『이 사람이나 이 사람의 부모가 죄는 범한 것이 아니다.』즉 무슨 특수한 죄의 값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결국은 고통과 사망을 가져온다고 하는 원리를 부인하시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 원리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어떤 사람이 특수한 고난을 받을 때에 그것은 꼭 그 사람의 특수한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결과라고 하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시정하십니다. 또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어떤 때에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는 직접 죄의 결과로 고난을 받는 사람을 혹 우리가 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음란한 사람이 어떤 성병으로 고난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직접 죄의 결과인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재난도 같이 당하고 고난도 공동으로 받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고난을 특수하게 당할 때에 꼭 그 사람은 배후에 특수한 죄가 있다고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하는 실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의미가 깊습니다.『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이것이 자기 죄도 아니고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다시 말하면, 이 불쌍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주의해 보세요. 예수 님께서 이론적 견지에서보다도 실제적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인간의 견지보다도 하나님의 견지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과거의 어떤 원인을 찾는 운명적인 견지에서보다도 현재 무슨 일을 할 수 잇느냐 하는 사명 적 견지에서 인간고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고를 통해서 그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리해서 고를 낙으로 바꾸어 주시고, 암흑을 광명으로 변케 해 주시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고, 인간의 재난도 축복으로 전환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고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귀한 영혼까지 구원하여 주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명인 것을 예수 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해서 예수 님께서는 다만 그 소경을 고쳐 주셨습니다. 암흑 속에 있는 그 소경에게 광명을 주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의 메시야인 것을 나타내어 그의 영혼까지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비참한 고난을 이와 같은 사명 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의 견지에서, 실제적 견지에서 보시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어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불쌍한 문둥이를 도와주기 위해서 나환자 병원이 일어나게 되고, 불쌍한 고아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혹은 고아원, 불쌍한 노인들을 돕기 위해서 혹은 양로원, 불쌍한 외로운 여인들을 돕기 위해서 혹은 모자원, 여러 자선 사업 단체,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실제적인, 사명적인 봉사적 견해에서 인간고를 보시는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것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인간고와 재난을 만날 때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고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내가 당할 수 있는가 하는 면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이 나 자신에게 올 때에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혹 질병의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가 혹 사업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습니까? 내가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까? 내가 이와 같은 고난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는 내게도 이 고난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고 인식하고 이 일이 무엇일까 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물 가운데도 사명이 있고, 질병 가운데도 사명이 있고, 슬픔의 쓴 잔 가운데도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회개를 재촉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신앙의 연단을 재촉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쓰시기를 원하시는 경륜이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하십시다. 둘째로는 누가복음 十三장에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인간고인 재난, 천재나 지변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고난에 대해서 잠깐 주님의 교훈을 생각하십시다. 이 재난이라고 하는 것도, 불의의 사고라고 하는 것도 언제나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 때 실로암 못 가의 탑이 갑자기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일시에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님께 와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본 모양입니다. 예수 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들 생각에 이렇게 이 탑이 무너지는 사고로 말미암아 열 여덟 사람이 갑자기 몰사를 하였는데 이렇게 됐다고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은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은『그러나 내가 분명히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할 때가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자, 여러분! 여기에 있어서도 우리 주님은 그 재난의 원인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설명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실제적 견지에서 우리가 마땅히 배울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여러분! 재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도 재난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불의의 사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이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옵니다. 예고 없이 바람이 붑니다. 예고 없이 홍수가 납니다.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건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勸勉) 하시는 말씀은 그런 까닭으로『너희가 죄를 회개하고 언제든지 준비하고 살아라』하는 말씀이올시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이것은 누구에게나 옵니다.『언제든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라.』그러면 언제 회개하란 말입니까? 이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를 마치고 길을 건너가다가도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릅니다. 전에 미국의 유명한 무디 선생이 시카고 교회에서 어떤 주일 저녁 설교를 하는데「회개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다가『자, 이것으로 오늘 저녁 시간이 다 가서 마칠 수가 없는데 내가 이 문제를 다음 주일에 마저 마칠 터이니 다음 주일 저녁에 다 나오시오』하고 말하면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방차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 화광(火光)이 충천해져서 그 때 그 굉장히 유명했던 튼 화재가 일어나서 시카고 전역이 거의 다 불탔습니다. 그 날 저녁에 무디 선생의 설교를 들은 사람 가운데도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당하고 무디 선생이 한탄하면서『내가 왜 그 날 저녁에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는 주일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었던가!』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는 지금이올시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언제든지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 님의 이 경고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두 가지로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 육체적, 정신적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五十三장 四절 이하에『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고를 통해서 사명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만 하지 않았습니다. 재난을 당할 때에 회개하라고 경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자기가 인간고에 참여해서 그 고난을 자기가 당하시고 모든 고난과 죄악가운데서 전 인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언제든지 이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수난자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면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를 힘써야 될 것입니다. 리빙스톤이 평안한 자기의 나라를 버리고 암흑의 아프리카 대륙에 제일 먼저 자기의 몸을 던지며 간 것도 십자가의 정신에 의지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성 다미엔 같은 사람이 문둥병 자들만 살고 있는 하와이의 한 섬 몰록카이 섬에 자원해서 일생토록 문둥이와 같이 살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감염이 되어서 죽은 것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대 잇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수난자와 같이 수난을 나누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올시다. 우리가 오늘날 특별히 순천의 수재민을 위해서 특별헌금을 하려고 하지마는, 이 수재민을 위해서 헌금하는 것도 우리가 이 정신을 가지고 고난을 받는 우리 동포와 나도 같이 참여하겠다고 하는 이런 정신을 가지고 헌금을 해야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헌금하는 사람이 될 것이올시다. 해방 후 六․二五를 비롯해서 이 한국의 땅에 여러 가지 재난이 임했습니다. 특별히 금년 여름은 참 재난의 여름 같습니다. 태풍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우리의 어부들이 난을 당하고 큰 홍수로 말미암아서 순천에 있는 많은 동포들이 회생되었고 또 며칠 전에 한강에서 나룻배가 뒤집혀서 많은 동포들이 불쌍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이 재난은 한국만 당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문지상에서 보는 대로 이란이라고 하는 나라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서 수만 명의 생명이 희생이 되었고 홍콩 같은 데도 얼마 전에 큰 태풍이 불어서 수백 명의 인명이 사상을 입었다고 하는 외보에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의 재난이 특별히 마음 아프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조금 더 잘 했으면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많은 까닭입니다. 순천의 사건만 할지라도 조금 더 그 뚝 을 잘 막았다면 이것을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이번 나룻배 사건 같은 것도 발동선의 고장이 좀 안 생기게 모든 것을 바로 정비하고 삭도(索綯)가 늘어지는 것도 미리 준비를 했다면 이런 사고는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재난은 사람이 아무리 바로 하느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또 생깁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인간고의 모든 의미를 다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깨닫고 그 이상은 모릅니다. 이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는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사람이 죽는 줄을 알지마는 언제 죽는 것을 우리 사람의 눈에 가리워 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님께서 오신다고는 분명히 말씀했지마는 언제 오실 는 지는 우리 사람의 눈에 가리웠어요. 아마 이 고난의 문제가 이것과 비슷할 것 같아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 문제를 이론적 견지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실제적 견지에서 예수님의 교훈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고나 재난을 만날 때에 사명적 견지에서, 우리가 이와 같은 때를 당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나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내 생활에 준비가 있어야 될 것을 각오해야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수난자와 같이 소고를 하며 이들이 육신을 건지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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