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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0:35-45/ 겸손, 섬김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58:48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十․三十三 - 四十四) 오늘 아침 읽은 성경 교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 주님의 마음속에는 멀리 십자가가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올라가는 도중에도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세 되면 악한 자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될 것과 그러나 사흘 후에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상하게도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어떤 정치적 의미의 왕국을 몽상하면서 제자들은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 보면 이런 때에 한 번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 과 야고보 형제가 자기 어머니와 같이 예수께 왔습니다. 조용히 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선생님 우리의 원하는 것을 꼭 이루어 주시기 바랍니다.』예수님의 말씀은『너희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그들은 『주님의 영광 중에서 우리 중 하나는 주님 우편에 앉게 해 주시고 하나는 주님 좌편에 앉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받으실 때의 우리 주님의 심중의 고독감과 고민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너희가 내가 장차 마실 잔을 마시며 내가 장차 받을 세례를 능히 받을 수 있겠느냐』했습니다. 예수 님은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이 뜻을 알지도 못하고 그들은 대답합니다.『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다시 하시는 말씀이『과연 너희가 장차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던지 그들에게 줄 것이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이런 말이 오고간 줄 압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디 비밀이 있습니까? 이야기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들렸습니다. 열 제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야고보와 요한 에 대해서 분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좌편에 앉고 다른 하나는 우편에 안겠다고? 요새 말로 조용히 가서 사바 사바 한데 대해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다고 복음에 보면 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제자들을 다 모아 놓으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 크다고 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 권세를 부리는 줄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여러분, 자세히 살펴보세요. 제자들은 크고자 해서 높은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크고자 하면 높은 자리를 구하지 말고 공손히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며『인자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그 생명을 대물로 주기 위하여 왔노라』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것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크다고 하는 위대성의 새로운 관념을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오늘 아침 이 위대함의 새 표준, 주님께서 주신 새 표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을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들은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해지려면 높은 지위와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그때의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때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온 유럽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 가이사라고도 하고 그 이름을 어거스트라고도 하는데 그는 그냥 황제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트 대제(大帝)라고 불렀습니다. 큰 황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틴말로 八월을 어거스트라고 하는데 그 왕의 이름이 같은 어거스트니까 八월을 적은 달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七월이 크니까 八월은 작은 것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거스트를 작게 할 수 없다고 해서 二월에서 하루를 떼어다 三十一일을 만들어 七월도 크고, 八월도 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트는 크다는 관념에서 역서(曆書)까지 고쳤단 말입니다. 또 그 때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왕은 헤롯왕인데 헤롯왕도 거저 왕이라 하지 아니하고 헤롯 대왕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二천년 전, 로마 시대에만 이런 위대함의 표준을 삼아 살아 온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느 시대나 다 이러했습니다. 우리 구한국 시대를 보아도 그러했습니다. 나이 좀 많은 이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너 글 잘 읽어라. 글 잘 읽어서, 과거(科擧)봐야 돼. 과거해서 벼슬을 해야 돼. 그리고 높은 벼슬은 해. 그래야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법이니까. 큰 권력을 가져! 그래야 크게 돼.』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과거보려고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위 현대인들도 그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이 위대함에 대한 이런 표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계장보다 과정이 큽니다. 과장보다도 국장이 더 큽니다. 국장보다는 장관이 더 큽니다. 그래서 저마다 장관 되기를 원합니다. 회사에서는 계장보다 과장이 큽니다. 과장보다 전무가 큽니다. 전무보다는 사장이 더 큽니다. 저마다 사장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옛 표준으로는 돈만 많으면 사람도 큰 줄로 생각합니다. 집이 크면 사람도 큰 줄로 압니다. 이런 표준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제일 큰 인물이 누굴 까요. 아마 제일 높은 고층건물을 지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도 고층 건물을 짓기 경쟁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표준대로 보면 二十세기의 최고의 큰이는 누구입니까? 아마 제일 먼저 히틀러 그리고 스탈린과 무솔리니 등을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현대인까지 이런 옛 사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는 이런 옛 표준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금력과 권력으로 권세를 뿌리는 자가 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종과 같이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그 이가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겸손해서 다른 사람을 많이 섬길수록 더욱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제일 많이 섬기는 이가 제일 위대하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위대함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선포했습니다. 마태복음 十八장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조그만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워 놓으시고 하시는 말씀이『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는 크니라』하셨습니다. 낮추는 자가 크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 十三장 三절 이하를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세요.『저녁을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했습니다. 주의해 들으세요. 예수 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큰 권세를 다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주님께서 다 아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로 오셨다가 하나님께 가실 것을 기억하셨고 또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높은 지위를 아셨단 말입니다. 이것을 다 아시면서도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가장 큰 권세,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시고, 그러나 하신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일,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는 봉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위대함의 새 표준을 자신의 행동으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위대(偉大)의 새 표준을 보여 주셨고 그 다음에는 그의 말씀대로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생명 전체를 희생해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봉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참 위대한 생활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위대함의 새 표준을 생활로써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깊은 진리를 깨닫고 삽니까? 이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 곧 높은 자리와 권세가 크다고 하는 사상, 또 위대함에 대한 새 표준을 겸손히 남을 봉사하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 두 표준을 비교해서 잠깐 생각해 보세요. 우선 그 동기를 생각해 보세요. 옛 표준의 동기는 어떠합니까. 그 속에는 높으려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곧 교만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얻으려는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함에 대한 새 표준의 배후에 있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그 속에는 나를 낮추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또 얻으려는 생각이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곧 이타주의(利他主義)입니다. 또 이 표준들이 사회에 주는 영향이 어떨까 생각해 보세요. 옛 표준, 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제자들이 서로 다툰 것처럼 싸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마다 높으려 하고 권세를 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 사회에 분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어떤 교회에서는 이따금 분쟁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옛 표준에서 사는 제직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반면에 새 표준으로 크고자 하는 이가 많은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회는 화평할 것입니다. 그 사회는 모든 방면에 빨리 발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협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상한 인격과 도덕적 생활은 봉사로써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새 표준이 참된 위대함의 표준이올시다. 이것은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단체 혹은 회사, 국가, 심지어 교회까지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어떠한 단체가 위대합니까? 저명한 인사가 있어서 위대합니까? 회원수가 많아서 위대합니까? 아닙니다. 요는 그 단체가 얼마나 사회를 봉사하는가, 봉사를 제일 많이 하는 단체가 위대한 단체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키와니스클럽이니 라이온즈 클럽이니, 우리 교회 안에서도 무슨 사니 무슨 회니 단체가 많습니다. 요컨대 어느 단체가 가장 위대한 단체입니까? 그것은 제일 많이 봉사하는 단체일 것입니다. 단체가 봉사하지 아니하고 다른데 힘을 쓰게 되면 사회를 분열시키는 파당 적 존재밖에 되지 못합니다. 이건 큰 상사나 회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상사나 회사가 위대합니까? 자본이 많아서 위대합니까? 무엇을 많이 만들어서 위대합니까? 아닙니다. 상사와 회사가 얼마나 그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이는 정당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당이 가중 위대합니까? 당원 수가 많은 전당입니까? 세력을 얻은 정당입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봉사로 사회에 공헌하는가? 거기에 정당의 위대성이 결정됩니다. 나라도 그래요. 어떤 나라가 아닙니다. 얼마나 그 나라가 온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는가에 따라서 위대한 나라가 결정됩니다. 역사를 보면 옛날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도 매우 작은 나라이지마는 옛날도 매우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나라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나라가 옛날에 정신적으로 세계 인류를 가장 크게 봉사했습니다. 기독교가 발생한 나라입니다. 전에 아테네 같은 나라는 매우 작은 나라였지만 위대한 나라로 인정들을 합니다. 왜? 비록 작지만 문화적으로 가장 큰 봉사를 세계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도 작은 나라입니다. 작다고 위대한 나라가 못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사실 세계 인류를 봉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으면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을 생각할 때 우리 아시아의 나라로서는 우리 한국이 신교에 있어서는 첫째 되는 나라 같은데, 온 교회가 참으로 부흥해서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로 다 인도하고 나아가서 온 아시아 지방에, 아시아 나라들에 복음을 전파해서 영적으로 봉사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위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교회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만 교회도 역시 이 표준으로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위대성이 어디 있습니까? 교인이 많은데 있는 것 아닙니다. 아름다운 예배당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그 교회가 얼마나 봉사를 하는가? 영적 봉사인 전도를 하는가? 그 밖에 여러 방면으로 이 사회를 봉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선 사업, 교육사업, 모든 방면으로 봉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봉사를 하는 교회가 위대한 교회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 四장 十절 이하를 가만히 읽어보면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로 서로 봉사하라』 다시 말하면 봉사를 하되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三년 전, 백림(伯林)에서 열린 세계 전도 대회에 참석했을 때 들은 빌리 그래함의 얘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들으신 분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이런 간단한 얘기입니다. 어떤 호숫가에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 때 기러기들이 공중에서 날아와서 호숫가에 앉아 물을 먹고는 공중으로 다시 날아 올라갑니다. 개구리들 가운데 하나가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나도 저 기러기처럼 공중에 날아 봤으면』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기러기에게『얘 기러기야, 나도 너처럼 공중엘 오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날 좀 도와줄 수 없겠니?』『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나.』『저기 막대기가 하나 있는데 저 막대기 한쪽 끝을 네가 입으로 물고 올라가고 나는 다른 쪽 끝을 입으로 물면 네가 공중에 올라갈 때 나도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 아냐,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니?』『그러지』그래서 기러기 한 놈이 막대기 한 끝을 물고 한 끝은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 올라가니 개구리도 올라갑니다. 호숫가를 한바퀴 빙빙 날아서 도니까 아래에 있는 수많은 개구리가 부러워서『저 개구리는 공중을 날아올랐구나, 누가 저런 생각을 해냈노.』개구리들이 칭찬을 합니다. 개구리가 물고 공중을 날아다니다 칭찬을 하니까『내가 했지』하고 자랑스럽게 대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자 어떻게 됐겠습니까? 공중에서 떨어졌습니다. 허리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요. 아무리 내가 봉사를 잘해도『내가 했지』 이렇게 자랑하게 되면 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좋은 일을 알도록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알게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를 봉사의 기회로 알라는 말입니다. 돈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을 벌었으면 그 돈으로 봉사를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 시내의 대학 학장이 내게 하는 말이 실제로 공과는 택하지 아니하고 경영학과를 많이 택한다고 그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학생들의 말이 공과를 해야 이 다음에 공장에서 일꾼이나 될 것이지만 경영학을 하면 이 다음에 사장이 된다고 한답니다. 새 시대에 새 대학생이건만 그 머리는 아직 옛 머리입니다. 그런 머리가 새로워 져야 우리 나라가 바로 섭니다. 가장 위대한 봉사를 하여야 크다고 하는 것을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모릅니다. 크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욕망은 아닙니다. 다만 참된 의미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재능, 적은 돈, 적은 지식, 낮은 지위에서도 남을 봉사하는 이는 많은 재능, 많은 돈, 많은 지식, 높은 지위에서 봉사할 줄 모르는 이보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는 가장 큰 봉사를 한 까닭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는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방면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는 줄 압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이 위대함의 교훈을 깨달아서 이 원리대로 다 살면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한번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이익을 주고 가는가 혹은 손해를 주고 가는가, 우리는 주고 가는 봉사의 위대한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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