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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2:1-12/ 이웃사랑, 전도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55:05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이 지붕을 뜯어 구명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 二․三-四)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은 다 아는 사실이올시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동리에서 가르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 용신 할 수 없으리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의 말씀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에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예수 님 앞에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마는 정작 와보니까 사람이 너무 많이 둘러서서 도저히 예수 님 가까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길이 없어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뚫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한국의 집 제도로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마는 그 때 유대 사람의 집 제도는 흔히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가 집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기가 쉽고 구멍을 내기도 쉽습니다. 그렇게 해서 줄에 달아서 그 중풍병자를 예수 님 앞에 내려보냈습니다. 여기 기록한 말씀을 보니까,『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저희의 믿음, 여기「저희」는 중풍병자가 아니고 그를 메고 온 사람, 그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에게 축복하시고 그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 이 네 사람의 믿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중풍 병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들의 믿음을 통해서 봉사 생활의 비결을 또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들의 믿음은 단순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철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은 줄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 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칠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을 꼭 믿었습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그를 네 사람이 메고 이처럼 온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밀리는 물결과 같지 않았습니다. 비록 믿음의 내용이 단순하나 의심이 없는 참된 믿음은 봉사 생활의 첫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이 중풍병자를 돕게 한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육신의 병, 심령의 병, 사회의 병, 국가의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오늘날 중풍병자와 같은 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봉사 생활의 첫 단계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이들의 믿음에는 사랑과 동정심이 따랐습니다. 이들은 예수 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더러 이 중풍 병자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괴로움을 불구하고 그를 메고 먼길로 온 것입니다. 자리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이 불쌍한 환자에게 봉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봉사 생활의 둘째 조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당시의 대중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마태는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험한 산골짜기에서 불한당을 만나서 많은 매를 맞고 모든 소유는 빼앗기고 중상을 입어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마침 레위 사람이 지나갔지마는 그는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 그 뒤를 이어 지나갔지마는 그도 그 넘어진 사람을 보기만 하고 다른 편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었을는지는 모르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정녕(丁寧)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상한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마 당시에 신학적으로 비판해서 그 믿음이 꼭 옳은지 알 수 없지마는 이 사람은 단순히 사마리아의 사상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 멈추게 하였고 상한 사람을 자세히 살피게 만들었고 자기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쳐 매주고 자기의 기름을 부어서 상처를 유화롭게 하고 자기의 탓 던 나귀를 태워서 주막까지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은 봉사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청년 시대에 배를 좀 탓 습니다. 한 번은 뉴올리언스 시에 우연히 가서 흑노(黑奴)시장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흑노 들의 한 가족이 여기 저기로 팔려 가는 그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동정심은 결국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흑노 해방의 구주를 만든 것입니다. 동정이라고 하는 뜻은 같이 느낀다고 하는 뜻입니다. 남이 배고플 때에 내가 배고픈 것처럼 느끼는 느낌이올시다. 남이 추울 때에 내가 추운 것처럼 느끼는 그 감정,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는 그 마음, 동정심, 이것 없이 봉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추운 겨울에 방공호에 사는 우리 동포들, 거리에 집 없이 배회하는 불구자들, 병자들, 고아들을 어떤 눈으로 봅니까? 셋째는 이들의 믿음에는 협동 정신이 있었습니다. 넷이 같이 한 중풍병자는 메고 왔습니다. 이들이 아무리 믿음과 사랑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 협조하는 정신이 없었던들 이 병자를 예수 님께로 같이 메고 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봉사 생활에는 이 협조 정신이야말로 필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한 병자를 넷이 메고 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우선 그 사람들 가운데는 키가 큰 사람도 있겠고 혹은 키가 작은 사람들도 있었을 터인데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똑같이 들어야 평평하게 병자를 메고 오려고 하면 키 큰 사람은 좀 낮게 들어야 되고 키 작은 사람은 존 높이 들어야 될 것입니다.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피차에 양보하는 가운데서 그 협조는 이루어졌을 줄 생각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네 사람이 들것을 메고 갈 때에 발걸음이 맞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갈 때 발걸음이 안 맞는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가 길겠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좀 짧을 터인데 다리가 긴 사람은 좀 짧은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다리가 짧은 사람은 좀 빨리 걸어가고 이렇게 해서 발걸음을 맞추어서 메고 왔습니다. 피차에 양보하고 양해해서 협동하는 이 정신이 없이는 우리가 어떤 방면에든지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조금 다르지마는 피차에 양보하고 절장보단(折長補短)해서 협조할 줄을 알아야 우리가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같이 봉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나 사회에 대한 봉사도 이러하고 국가나 세계에 대한 봉사도 똑같은 원리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좋은 성가대는 통해서 합창을 들었지마는 합창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 가운데 생각되는 것은 그들이 같은 음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자는 고음으로 노래 부릅니다. 소프라노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는 낮은 음으로 부릅니다. 알토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좀 높이 부릅니다. 테너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좀 낮게 부릅니다. 버스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 다른 목소리들이 다 합해서 조화되어 노래를 부를 때에 위대한 하모니를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코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은 다 각각 키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이렇게 낸 것이 의의가 있습니다. 다르다고 싸우라고 낸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운데서 피차의 장점을 살려서 협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봉사하고 이 사회를 봉사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봉사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 협조 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페르시아라는 나라에는 이상한 새가 있어서 이 새는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날지 못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수놈의 바른 편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암놈은 윈 편에 고리 같은 것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그 수놈과 암놈을 걸고서 둘이 날아 갈 때는 썩 잘 날아갑니다. 세상에 혼자 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혼자서만은 할 수 없습니다. 독불 장구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협조해야 봉사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넷째는 이들의 신앙에는 견인성(堅忍性)이라고 할까, 혹은 지구성(持久性)이 있습니다. 이들은 멀리서 중풍병자를 메고 오기는 왔지마는 와서 보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수 님 앞에 가까이 도저히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네 사람이『에, 할 수 없구만』하고 돌아서 간 것이 아닙니다. 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다른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연구해야지, 아무래도 길은 있습니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 보았습니다. 낙심하고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옛날은 시멘트가 아니고 흙으로 했으니까, 뜯기가 좀 쉽기는 쉬었지마는 남의 지붕 뜯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떨어지기도 하겠고 대단히 미안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네 사람에게는 꼭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이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우리가 그만 두겠느냐? 끝까지 예수 님 앞으로 나가자!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계속했습니다. 끝까지 관철하는 이 성품이 필요합니다. 영어에 큇(qui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얼 하다가 안 되면 큇 한다면(그만 둔다고 하는 뜻입니다)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법 없습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여 나아갈 때는 난관이 반드시 가로 박힐 때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난관을 당할 대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여기에 봉사생활의 선공이 잇느냐, 없느냐가 달린 것입니다. 불퇴전(不退轉), 물러가지 아니하고, 백절불굴의, 백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아니하는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가는 이런 것이 결국은 이들로 하여금 이 중풍병자를 참으로 도와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에디슨이 백열등을 처음 발명할 때에 이렇게 해보아도 안되고 저렇게 해 보아도 안 되고 마지막에는 열흘 동안을 자기 집에 도무지 돌아가지 아니하고 실험실에서 자고 먹으면서 계속해서 마지막에 성골하고야 말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컬럼버스가 맨 처음에 인도로 향해서 간다고 대서양을 향해서 나간 때에 한 달쯤 후에는 선원 전부가 배반하려고 했습니다.『아무리 가야 보이지도 않는 것을 뭐 하려고 가느냐? 돌아가자.』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격려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만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네 사람의 믿음에는 단순하지마는 철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동정이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서로 협조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이들이 견인성과 지구성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는 그들이 환자를 예수 님 앞에 갖다 놓고야 말았습니다. 병 고치려고 하는 목적인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이 환자를 보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네 죄를 사함이 되었다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언제든지 불행의 근본을 깊이 살피시고 그 근원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세상 사람은 불행의 원인을 흔히 외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혹은 환경이나 혹은 물질이 있고 없는 데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그 깊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 님께서는 죄를 사해 주셔서 근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병까지 고쳐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이 네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중풍병자를 위해서 한 것이 없습니다. 할 수도 없고 친히 고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한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 님 앞에 갖다 놓은 것뿐입니다. 실상 죄를 사해주시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예수 님이십니다. 오늘날 주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다고 애쓰지마는 사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실지로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축복까지 할 능력이 없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모든 환자를 주님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올시다. 여러분, 영적 안목으로 볼 때에 우리 한국은 문자 그대로 중풍병자올시다. 절반은 아주 못쓰게 되었습니다. 절반이래야 겨우 움직일 정도로 한심한 형편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같은 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갔다 놓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의 할 일이올시다. 이 중풍병자 같은 우리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까지 메다 놓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다 믿는 분인데 이런 환자를 주님께 메고 오는데 현재 한 몫 하고 있습니까? 혹은 아직까지 구경꾼으로만 있습니까? 이렇게 중한 환자를 앞에 놓고 예수 님 앞에 꼭 메다 놓아야 죄 사람을 받고 병도 고쳐서 건강한 사람으로 중생을 하겠는데 이 위대한 일에 여러분도 한 몫 메었습니까? 아직도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한 몫 멜 수 있습니까? 주일학교 한 반을 잘 맡아서 매 주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도 한 몫 메는 일이올시다. 성가대를 맡아서 매 주일 충성스럽게 책임을 잘하는 것도 한 몫 메는 일입니다. 한 구역을 맡아서 구역에 있는 여러 교우들을 잘 돌보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입니다. 보린 원이나 경로 원의 후원회에 들어서 다 같이 이 귀한 기관을 운영해 나가는데 협조하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이올시다. 남 전도 회나 여전도회에 들어서 같이 재정적으로 전도하는 데 협조하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이올시다. 그 밖에 장년 면려회(勉勵會)나 청년 면려회나 다른 면려회에 가담해서 주를 위해서 여러 가지 운동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 참여하는 것도 한 몫 메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금년 새해에 한 몫 메는 다른 방면을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금년은 특별히 개인 전도의 해로 작정하고 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 전도를 통해서 한 몫 메는 운동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금년에 작년까지는 한 몫 메지 못했지마는 이 개인전도 운동에는 누구든지 한 몫 멜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멜 수 있는 분은 오늘 아침에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앞으로 二월초부터 부활주일 때까지 한 주일에, 남자이면 하루 저녁, 여자이면 한 오후, 온전히 전도를 위해서 시간으로 바칠 수 있는 분은 따로 모여서 개인전도 단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이 금년 새해에는 우리가 구경꾼 노릇만 하지 맙시다. 이 중풍 병 환자를 그리스도에게 모시고 오는데 아무 구석에서도 한 몫 메어서 이 귀한 사명을 우리가 다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먼저 철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협조 정신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끝까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정력, 충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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