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7-26/ 생명의 존귀성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30:22

『살인하지 말찌니라.』(출 20․13)

오늘 아침엔 제六 계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제一 계명에서 제四 계명까지는 우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가르친 것이올시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는 계명으로 통일될 수 있는 거십니다.

다섯째 계명으로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를 교훈하는 계명들이올시다. 이 계명은『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는 한 계명으로 또한 통일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웃에 대한 계명은 제일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여섯째 계명은『죽이지 말 찌니라.』라는 교훈이올시다. 생명의 존귀성에 관한 교훈이올시다.

이 우주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진주가 아닙니다. 금강석이 아닙니다. 생명이올시다. 생명은 신기합니다. 그 근원 그 형태를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이 그 신비의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작은 씨에서 새싹이 나오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은 신선합니다. 존엄합니다. 이 여섯째 계명은 이와 같이 귀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계명이올시다. 인도교나 불교에서 불 살생(不殺生)의 교훈이 잇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0세기에 있어서 위대한 선교사인 슈바이처 같은 이의 사상은「생명에 대한 경외(敬畏)」입니다. 거기에 그의 철학 사상의 근거를 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 이 여섯째 계명의 근본 정신이올시다. 그러므로 꽃 한 송이라도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동물의 생명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계명은『살인하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물론 이런 계명을 읽을 때 누가 살인죄를 범하겠느냐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살인 가운데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직접 살인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래서 직접 살인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 된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도 가인의 후손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보면 살인 사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일가족 몰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이따금 보도가 됩니다. 해방 후 남한에서도 아주 불행한 정치적 암살 사건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공산 치하의 숙청 사건을 생각해 볼 때 아직까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세계에 어떻게 살는지 통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부주의한 차량의 불비(不備)나 부주의한 운전으로 말미암아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가족 계획 시대라는 미명하에 의사나 가정 부인들이 계명을 범하기 쉬운 때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 계명을 범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국법에 의거한 사형입니다. 옛날부터 살인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법에 의거한 사형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습니다. 다음에는 정의에 입각한 전쟁 수행 중에 일어난 살인입니다.

침략 전쟁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불의 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어하기 위해 정의에 입각한 전쟁에서 부득이한 살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정당 방위로 인정되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국법으로 사형이 필요 없는 사회, 전쟁 없는 평화의 세계를 위해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접 살인에 간접 살인이 많습니다. 신문에 이따금씩 보도되는 대로 어떤 집에서 음식을 해 놓았는데 그 음식을 먹고 중독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건 같은 것은 간접 살인의 경우입니다. 부정한 음식은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됩니다. 하물며 부정한 약품 전염병을 숨겨서 남에게 전해 주는 일 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침 한 번 잘못 뱉어서 간접 살인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했지만 차량의 부정비(不整備)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건들과 술이나 마약이나 심지어 담배까지도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무지와 미신으로 말미암아 병을 기르고 잘못해서 간접 살인의 원인을 만드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위정자의 실정이 낳는 부정과 부패로 말미암아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거도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도에 넘치는 과외 공부도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옛날 모세의 율법을 보면 어떤 사람이 떠받는 소가 있는데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소를 잘못 단속해서 사람을 받아 죽였으면 그 임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려면 나의 생활과 나의 의무와 나의 사업과 나의 일상 생활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부인들은 음식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위생의 법칙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공중 위생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간접 살인에 참여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셋째로 심리적 살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형제에게 대해 노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도 요한 의 말씀과 같이 형제에게 대하여 노하는 자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 노할 수 있지만 이것을 오래 품으면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변하기가 쉽습니다.

그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일면 실상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리적 살인을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노나 증오심이나 원한이나 복수를 우리 마음 가운데 품는 것은 벌써 살인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잉태되면 실제로 살인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범하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웃는 얘기로 하지만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저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심리입니까. 마음으로 벌써 살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바로 다스리며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또 구설(口舌)적 살인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입과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계속해서『형제를 향하여 라가라 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라가라」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욕할 때 쓰는 말인데 아마 한국말로 하면 바보란 말인 것 같습니다. 또 형제를 향해 미련하다고 하는 놈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인격을 존중해서 살인 안 할 것은 물론이요 말로도 멸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꼭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학생들 간에 혹은 청년들 간에 농으로 하는 얘기라도 지독한 말을 이따금씩 쓰는 것을 들을 때에 아주 섭섭합니다.

가령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자식 죽여 버린다. 꼭 살인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말은 아주 독한 말입니다.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기 심지어 어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욕할 때 보면 참 두렵습니다.

『어서 죽어라 썩어져라.』꼭 그 뜻이 아닌 줄 압니다마는 죽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편 一四0편 三절에『뱀과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뱀처럼 날카로운 말이 있습니다. 독사의 독과 똑같은 독이 말속에 잠겨 있습니다. 하물며 거짓된 입술, 혹은 붓끝을 함부로 놀려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하고 거짓 선전으로 다른 사람을 매장한다고 하는 것은 입술과 붓끝으로 사람을 죽이는 정신적 살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로써 다른 사람을 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영적 살인이 있습니다. 인간의 명예도 귀합니다. 그러나 아주 귀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올시다. 남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적 살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린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친히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다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더 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내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살인의 종류가 있습니다. 자살은 살인이올시다. 내가 나의 생명을 좌우할 권리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내가 내 생명을 끊는 것도 살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자살한 사람이 다섯 명 있습니다. 그들은 다 신앙에서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사울 왕, 그 병기든 사람, 아히도벨 이라고 하는 다윗을 배반한 간신, 시모리 라고 하는 아주 악한 왕 그리고 주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 이와 같이 다섯 사람의 자살자를 찾아 볼 수 있으며 그들은 다 신앙의 타락자입니다.

자살은 절망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하나님도 안 믿고, 내세도 안 믿고, 내세의 심판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자살에 대한 반기는 오직 참된 신앙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계명을 바로 지킬 것인가.

첫째 바른 인간관을 가져야 합니다. 二十세기는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가 되었습니다. 二차 대전에 많은 생명이 희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치스 정권 아래 무죄한 유대인들 육 백 만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또 중공의 혁명과 소련의 혁명이 일어날 때 몇 천만이 생명을 잃었는지 알 수 없는 이런 시대입니다. 왜 二十세기가 이렇게 무서운 시기가 되었습니까? 그 근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십 세기에 들어와서 유물론적 사상이 대두하였습니다.

유물론적 견지에서 인간을 봅니다. 이런 견지에서 인간을 보면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이란 필요하면 먹여 살리고 필요 없으면 죽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유물론적 윤리관을 가져온 결과 이러한 살인 사건이 많은 무섭고도 참혹한 세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물리적 육체를 가졌지마는 물질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그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적 인간관의 회복만이 이 험악한 사회를 변화시켜 살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들의 감정을 극기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래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날 때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물론 위대한 왕이지만 술좌석에서 자기 부장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였다고 성을 내어 그 자리에서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자기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기록하기를『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는 다스릴 줄 알았지만 자기 자신은 다스릴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감정 생활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감정을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란 하나님의 사랑을 좀도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살인, 다시 말하면 간접살인과 자살의 원인이 되는 사회악 즉 부정부패, 빈궁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옳은 정치를 하고 옳은 경제 재건을 하고 사회 봉사를 해서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인간의 생명이 완전한가 하는 것이 문명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안전하게 해 줍니까?

인간의 생명이 안전한 평화의 사회를 이루어야 할텐데 이런 사회는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만 잘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에 정신적 배경이 있습니다. 강력한 종교의 뒷받침이 없이는 이런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잘 지키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회에 복음을 전파해서 이 사회 자체가 기독교의 감화를 받도록 우리는 최대의 노력을 해야만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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