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12/ 심령이 가난한 자/ 한경직 목사
2014-08-22 23:25:58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어느덧 1960년, 이 새해 첫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많은 희망을 가지고 피차에 복을 비는 풍속이 있습니다. 건강을 빌고, 행복을 빌고, 남북 통일을 비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흔히 복을 빌 때에 수부귀다남자(壽富貴多男子)하소서. 이렇게 복을 빌어 왔습니다. 오래 살고 부해서 돈 많이 모으고 귀하여 지며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고 또 그 다음에는 아들을 많이 얻으라는, 이런 복을 흔히 빌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이 복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복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은 혹 복이 될 수도 있고 혹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오래 사는 것을 우리가 흔히 복이라고 하지마는 오래 산다고 반드시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부터 수즉다욕(壽卽多辱)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을 많이 보기 쉽습니다. 물론 부하여지는 것을 다 복으로 생각하지마는 이것도 복이 되는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하여 짐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허영과 부패함에 빠지게 되어서 오히려 복이 변해서 화가 되는 가정을 종종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귀하게 된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이 보통으로 볼 때는 좋아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조금 잘못하면 오히려 그런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만 못한 것입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 큰 세력을 가졌었습니다.

무솔리니 같은 사람도 역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서 큰 권세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생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된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자기 자신들의 참화를 가져 온 것뿐입니다.

물론 아들들을 많이 두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역시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많이 두면 혹 못된 아들이 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러한 아들로 말미암아서 좋은 가문이 참혹한 일을 당하는 예가 옛날이나 오늘이나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와 같은 축복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으며 또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잠깐 동안 이 세상에 있어서의 복이요, 잠깐 동안 이 세상에 있어서도 오래 갈는지 또한 의문인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 성경에도 복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런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본문대로 좀 더 가깝게 번역하면 二절에 복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이렇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복이라고 하는 말은 본래 헬라 말로「막카리오스」라고 하는 말을 그대로 썼는데 이 말의 뜻은 즐거움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헬라 말에 즐거움이라고 하는 말은 딴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즐거움 가운데도 거룩하고 신성한 즐거움을 가르친 것이요, 또한 이 즐거움은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즐거움을 가르친 것입니다.

『거룩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서북 편 가버나움 근처에 가보면, 전설적으로 예수 님께서 친히 올라가서 이 여덟 가지 복을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팔복(八福)산이 있습니다.

그 팔복산에 올라서서 남쪽을 내려다보면 갈릴리 바다 가 눈앞에 문자 그대로 푸른 옥과 같이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그렇게 큰 바다가 아니어서 동편에서 서편까지 다 눈 아래 볼 수 있도록 나타납니다. 그 팔 복산 위에는 언제 지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팔복정(八福亭)을 지었습니다.

팔복 예배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팔복 예배당은 여덟모가 나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보면 높은 천장이 여덟 모로 놓였는데 한 면마다 여덟 가지 복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게 되면 마치 여덟 가지 복 사이에 서 있는 거와 같은 그런 느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여덟 가지 복을 다 받을 수가 있다고 하면 더 이상의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을 받을 만한 분은 어떠한 분이라고 가르쳤습니까?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 둘째는 애통하는 자, 셋째는 온유한 자, 넷째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다섯째는 긍휼히 여기는 자, 여섯째는 마음이 청결한 자, 일곱째는 화평하게 하는 자, 여덟째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과연 거룩하고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즐거움의 축복을 받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덟 가지 복에 대한 교훈을 일찍이 야곱이 벧엘에서 자다가 꿈 가운데 본 하늘에 닿은 사다리에 비유하여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의 사다리를 하나 둘 올라가면 그야 말로 문자 그대로 온전히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여덟 가지 복을 음악의 여덟 가지 음계에 비유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악이 온전한 음악이 되려고 할 것이면 여덟 가지 음이 다 나야 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여덟 가지 음이 다 나야 완전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여덟 가지 복을 다 받아야만 믿는 사람의 생활이 음악적으로 표시된 때에 완전히 화음 된 하모니가 된 생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새해 첫 아침에 우리가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복을 충만히 받는다고 하면 이에서 더 큰복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이 짧은 시간에 여덟 가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까닭으로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첫 계단이 되는, 첫 음계가 되는 교훈만 잠깐 동안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오.』

심령이 가난한 자, 거기서부터 복의 사다리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모든 복을 받는 첫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죄를 애통할 줄도 알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성품이 온후하여 지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남을 긍휼히 여김을 알게 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마음이 맑아 질 수 있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화평케 할 수도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어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참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령이 가난한 것은 모든 다른 축복의 첫 계단이 되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가리켰습니까? 우리가 먼저 이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베풀어서 가르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세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세인은 성전에 들어 와서 얼굴을 들고, 아마도 두 손까지 들고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 하옵기는 나는 토색(討索)도 한 일이 없고 불의한 일을 하는 일도 없고 간음을 한 일도 없고 또한 저기 앉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드렸고 모든 얻은 바의 십일조를 다 드렸습니다.』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들어 왔지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오직 가슴을 두드리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런 말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바리세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죄인의 기도,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부하다고 하는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 바리세인의 마음은 부하였습니다.

나는 불의한 일이 없고 나는 토색한 일도 없고 나는 저 세리와 같은 그런 일을 한 일이 없고 나는 율법에 가르쳐서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하였습니다. 마음이 부했습니다. 자연히 마음 가운데는 자만이 가득 찼고 교만이 가득 찼고 독선이 가득 찼습니다. 마음이 부했습니다. 자연히 이런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세리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압니다. 토색한 줄 압니다. 불의한 일을 한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세리는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을 감히 얼굴을 들 수도 없고 오직 가슴을 두드리면서 그저『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이 세리는 죄인이지마는 그 심령이 가난했습니다.

그 심령이 겸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서 그 심령을 부흥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겸손한 자를 의미할 줄 생각합니다. 반면에 마음이 부한 자는 교만한 자를 의미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교만의 죄를 짓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다 교만한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교만을 없이 하여 참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우리 기독교 인생관의 근본 이념이 되는 청지기의 관념을 철저히 깨닫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은 성경에 교훈으로 보면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 자시오 우주의 소유자십니다.

우리 인간은 잠깐 동안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에 한 번 왔다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잠깐 동안 무엇을 대부 받는 청지기뿐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있어서 무엇이 내 것이다,

내 소유라, 이렇게 말하지만 실상은 내 소유는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인데 내가 하나님의 소유를 대신 맡아서 청지기로서 세상에 살 때에 쓰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청지기인 까닭으로 항상 이것을 맡아 있을 것이 아니고 맡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입니다.

남의 것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마지막에 회개할 때가 있는 것과 같이 내가 맡은 바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는지를 장차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四장 七절에는 이 진리를 단적으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

여러분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재주가 있어서 그 재주를 자랑합니까? 그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학식이 있어서 그 학식을 자랑합니까? 그 학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께 무슨 재물이 있어서 그 재물을 자랑합니까? 그 재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지위가 있어서 그 지위를 자랑합니까? 그 지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다 내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다 심판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가졌다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대신 사용하는 청지기뿐이지 어찌하여 이것이 내 것인 줄 알고 있다고 교만하고 자랑합니까? 이 진리를 깨달을 수록 지식 있는 사람이면 지식이 있으므로 겸손해 집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쓸 사명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내게 물질이 있지만 이 물질 때문에 내 마음이 더 겸손해 집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물질을 내게 맡긴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쓰라고 이것을 맡겼은즉 이 앞에 심판 받을 것을 깨달을 때에 더욱 황송하고 겸손할 수밖에 다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재주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인간이 가졌다고 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주인이시오, 나는 청지기라고 하는 이 근본 원리가 마음 가운데에 있을 때에 내게 무엇이 있든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고 머리가 숙여지며 겸손해질 수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이것이 내 것 같아서, 내가 잘나서 얻은 것 같아서, 이렇게 할 때에 교만이 생기고 자만이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는 누구든지 다 문자 그대로 거지입니다. 우리는 벗은 몸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무엇을 가졌든지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거지입니다. 누구나 다 만 량쯤 빚진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채 자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언제나 잊지 말고 내게 어떠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든지 겸손하게 그 은혜를 사용할 뿐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가서 내 자신을 깊이 알아야 됩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네 자신을 알라 하였지만 그 말에 의지해서 내 마음을 좀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왜 겸손해야 하느냐 하면 내게 있는 게 없으니까 겸손해야 됩니다.

둘째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더러는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겸손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게 무엇인지 압니까?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손 안 씻고 잡수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들이 은과 주발과 입는 것을 깨끗이 씻을 줄 알지 만은 네 속에 더러운 것을 씻을 줄은 모른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다고 말씀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밝은 눈은 엑스광선 같아서 우리의 속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십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추일 때에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허물이 있는 대로 다 들어 납니다.

마태복음 十五장 十九절에『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러분 지금은 텔레비전 시설이 잘 되어서 텔레비전을 봅니다. 만일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생각이 얼른 텔레비전처럼 이마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이마를 가지고서 거리에 잘 나다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생각하는 그대로 우리 이마에 나타난다면 아마 피차에 얼굴을 대하기가 대단히 민망할 것입니다.

피차는 말할 것 없이 내가 내 거울보기에도 민망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속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더러운 죄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더럽습니다. 더러운 죄악이 우리 사람의 속에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이렇게 더럽고 약하지만 더러운 줄도 모르고, 악한 줄도 모르고, 교만한 생각만 있습니다. 미련합니다. 그저 간단히 말하면 중생하지 아니한 인간의 속에 잇는 것은 더러운 것, 약한 것, 미련한 것, 이 세 가지밖에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스스로 살필 때 사도 바울과 같이『나는 죄인이올시다 죄인 가운데도 괴수올시다.』이렇게 누구든지 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가 세리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통회하면서 자복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테가 버질의 인도를 받아서 연옥을 구경할 때에 한 층계에서 위 층계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그 층계가 높고 발이 무거워서 올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더니 자기 이마에 있는 교만의 표를 날개로 쳐서 떨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발이 가벼워져서 얼른 위 계단으로 올라가는데『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천사들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교만은 만 악의 근본이며 겸손은 만복의 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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