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6:21-28/ 그리스도인의 각오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12:17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十六․二十四)

마태복음 十六장에는 유명한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을 지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제자들은 곧 대답했습니다.『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선지자 가운데 하나라고도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때에 베드로가 서슴지 않고 얼른 대답하는 말이『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있은 후부터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가 장차 엘리야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되겠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합니다.『그리하지 마시옵소서. 이 일이 주님 앞에 가까이 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주님은 곧 베드로를 향해서 책망하셨습니다.『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계속해서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분명히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좇으려고 하면 마땅히 지불할 대가가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마땅히 각오할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순절기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의 이 엄숙한 교훈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든지…」예수 님께서는 누구나 다 부르십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름은 세계적이요 공통적입니다.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다 올 수가 있습니다.『무릇 목마른 자는 다 내게 와서 마시라.』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불할 대가가 있습니다. 각오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할 것. 또 하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질 것.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여기 특별히「나를 따라오려거든」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예수를 따라와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예수 님에 대한 신조를 암송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만도 부족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만도 부족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따라간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따라간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 가시는 데 나도 가고, 예수님 행하시는 일을 나도 행하고, 예수님 당하시는 일을 나도 당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하신 일 가운데는 고난과 십자가도 있은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과 같이 행하고, 같이 살며, 같이 죽고, 같이 부활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데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어떤 사람이 망대를 지으려고 하면 먼저 앉아서 그 경비가 얼마나 들겠는가 헤아려 볼 것이 아니냐?』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나를 따르는 것인데 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라고요? 간단히 말하면 이미 말한 대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몇 가지 뜻이 포함된 줄 압니다.
첫째는 극기의 뜻이 있습니다. 즉 나를 이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九장 二十七절에 사도 바울이 친히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사도 바울은 자기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또 자기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三장 五절에 보면『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이 우상 숭배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내 몸에는 땅에 붙은 지체가 있습니다. 이 지체를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음란, 부정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로마서 八장 十三절에』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줄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의 행실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 친히 말씀하시기를『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버려라 한 눈으로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한 손으로 천당에 가는 것이 두 손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내 육체를 근거로 하는 모든 죄악을 온전히 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온전히 과거의 죄를 끊고 열매 맺는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보다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에게 속한 것 가운데 꼭 죄는 아니지마는 주를 따르는 데 방해되는 것은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아니지마는 방해되는 게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따라 다릅니다. 음식, 의복, 오락, 사교생활의 습성 따위 가운데 주를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들이 있으면 이것은 끊어버려야 됩니다. 각각 이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내게 있어서는 이것이 무엇인가? 모든 안일과 사치와 향락과 속세 적인 것은 똑 죄는 아니나 끊어버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부정해 버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일찍이 베드로로가 예수께 대하여『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하고 부인했다고 하는 말과 꼭 같은 글자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부정해버리고 잊어버리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내 생활의 중심이 자기라고 하는 것이었지마는 그것을 온전히 없애버리고 예수를 자기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의 최고 목표가 내 자신이었지마는 그 자신을 없애버리고 예수로 내 생활의 최고 목표를 삼으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뜻을 행하기 위해서 항상 애써 왔지마는 내 뜻은 없애버리고 예수 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해서 교회를 봉사하나 나를 위해서 봉사하지 말고 주를 위해서 봉사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되 나를 위해서 전도하지 말고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전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다 그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있습니까?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육체에 속하는 모든 죄와 꼭 죄는 아니나 방해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자신 전체를 부정하고, 예수 님으로 내 생의 중심을 삼아야 되겠습니다.

둘째는『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소극적으로 내 자신을 부인하고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지고 따라오라고…하십니다. 무엇을 지라고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 죄의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니까? 오해사지는 맙시다. 죄의 짐을 지고 따라오라는 말은 아닙니다.

강도 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죄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습니다. 죄 값으로 그들은 그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올라갔습니다. 여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죄의 십자가를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처음에 말한 대로 나를 온전히 부인하고, 육체에 속하는 모든 죄를 온전히 끊어버리고, 회개하면 죄의 짐은 없어집니다.

여러분도「천로역정」을 읽어 보셨겠지마는 기독도가 처음에 장망성을 떠나갈 때에는 죄의 짐을 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서 예수 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죄의 짐은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죄의 짐을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죄의 짐을 지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 지라고 하는 십자가의 뜻은 무엇입니까? 세 자기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생활에 자연히 따르는 고통, 혹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야 하면 우리 인간이 세상에 살 때, 이 산다고 하는 생(生)가운데는 고(苦)라고 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이 있는 곳에 고통이 반드시 따릅니다. 고통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불가피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에서도 옛날부터 인생은 나면서부터 네 가지 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생(生)노(老)병(病)사(死)라고, 즉 낳는 데 고통이 있고, 늙는 데 고통이 있고, 병나는 데 고통이 있고 죽음의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이 고통의 십자가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三八선이 있고, 六․二五사변이 있고, 천재지면이 있고, 여러 가지 불안한 사회 가운데서의 사업의 실패가 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 인생 고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받으나….』우리 믿는 사람도 이 환난은 꼭 같이 받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각각 다 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를 잘 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를 불평하지 말고, 이 십자가에 반항하지 말고, 이 십자가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잘 지고 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내 주의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이 내게도 있는 십자가를 잘 지고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분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마는 항상 마음 가운데『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하는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역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산 중턱쯤인데 십자가를 여러 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위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네가 지고 올라오는 십자가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울 텐데 여기십자가가 많이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나 택해 보아라』하는 말입니다.

그래서『옳다 되었다. 다른 것 하나 얻어보자』하고서 살펴보니 참 자그마한 십자가가 하나 있습니다. 빛이 뻔적뻔적 나고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그는 얼른 이 십자가를 한 번 져보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니 조그맣기는 조그마한데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거워서 일어나기조차 어렵습니다.

겨우 일어서 몇 걸음 걷다가『이거 너무 무거워 못 지겠습니다.』하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걸 하나 골라 보라고 합니다. 이번엔 조그마한 중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 피어 있습니다. 향기가 나고 아름답고 해서 이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져보니 처음엔 괜찮더니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않습니까? 이 가시가 어떻게 잔등을 찌르는지 지고 갈래야 걸을 수가 없습니다.『이건 너무 가시가 많아 못 지겠습니다.』

『그럼 벗어 놓아라. 어떤 십자가를 택하려느냐?』잘 살펴보다가 골라잡은 것은 처음에 벗어놓은 자기의 십자가였습니다.』『그건 네가 벗어놓은 십자가가 아니냐?』『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그럼 네 마음대로 해라.』자기가 벗어 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가니까 한결 가볍더라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다른 사람은 별로 십자가가 없고 내가 진 십자가가 제일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사람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혜 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각기 주어진 십자가인데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그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세상 사람에게는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핍박의 십자가입니다.

어두운 것은 빛은 싫어합니다. 불의는 의를 싫어합니다. 악은 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수를 믿는 사람도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은 내가 주를 믿음으로 빛의 아들이 된 까닭으로 누구나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디모데 후서 三장 十二절에는『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옵니다. 가정에서도 핍박이 옵니다.

오늘날도 믿지 않는 가정에서 먼저 나와서, 믿는 이들 가운데 이 핍박 때문에『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종종 저한테 와서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가정에도 핍박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핍박이 있습니다. 꼭 신앙대로 무엇을 하려고 해 보세요. 직장에서도 핍박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핍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이것은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인데 과거의 모든 선지자들도 다 이 핍박의 십자가는 졌으니 선지자들의 후계자인 너희들도 이런 핍박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오히려 이런 핍박을 받을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을 때에는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 아닙니다. 기쁨으로 그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한 가지 십자가가 더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질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신 것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요. 남을 위해서 십자가는 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적은 규모이지마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십자가를 자원해서 져야합니다. 봉사를 하려고 하면 거기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가 고아들을 위해서 봉사하려고 합니까? 노인을 위해서 봉사하려고 합니까?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려고 합니까? 윤락여성을 위해서 봉사하려고 합니까? 불량 소년소녀들을 선도하기 위해서 애씁니까?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중심으로 봉사하려고 합니까? 거기에 고난이 따릅니다. 십자가가 따릅니다. 기쁨으로 이 십자가를 자원해 져야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받기를 힘씁니까? 거기에 십자가가 따릅니다. 기쁨으로 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몇 달 전에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주던 유명한 의사 칼슨 박사에 대한 기사를 우리가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그 곳에 가서 일하다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위해서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불완전합니다. 사회악이 많습니다.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매일같이 신문지상에 떠드는 대로 미국에서는 지금 자유와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굉장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만이 이것을 위해서 힘쓰는 것 아닙니다. 흑인 교인들만 십자가를 지는 것 아닙니다. 여러 백인 목사들, 여러 백인 교수들, 여러 백인 신자들이 이와 같은 악을 미국사회에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데모를 하고 강연을 하고 굉장히 운동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고난이 따릅니다. 많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매도 맞고 최루탄을 받기도 합니다. 흑인만 더러 죽는 줄 압니까? 여러분도 신문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보스톤에서 젊은 림 목사라고 하는 이가 아직도 옛 사상에 속한 어떤 흑인에게 매를 맞아 죽지 않았습니까?

바로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디트로이트에서 한 여자 교수가 K K K 즉 큐 클럭스 클렌 이라고 하는 민족적 편견을 고집하는 비밀단체 원에게 총을 맞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다 더 명랑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믿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믿는 사람들도 좀더 이런 십자가를 져야 되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있는 부패, 부정 모든 불결한 것을 없애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마틴 루터 선생은『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가 과연 참 제자인지 혹은 떡덩이나 물고기를 얻어먹으러 다지는지 그것을 분별하는 시금석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피하면서 예수를 따라가는가? 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참된 예수의 제자냐, 아니냐의 시금석입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十五장 三十一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한 번 순교하는 것도 물론 어려운 것인데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라고. 예수님께서는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이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제자는 이런 제자들입니다. 물론 이 길운 위험합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의와 승리와 영광의 길입니다. 십자가 뒤에 반드시 면류관이 오는 것입니다. 방금 말했지마는 민권운동의 큰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알라바마의 수도인 몽고메리로 행진할 때에 이런 말을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매를 맞을는지 수감이 될는지 최루탄(催淚彈)을 맞을는지 죽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행진할 수밖에 없다.』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나치스 독일 때에 순교한 독일의 유명한 청년 신학자이며 또 설교가인 본 회퍼라고 하는 이가 그 저서에서 어떤 사람에게 경고하기를『우리는 값비싼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고 하면 비싼 값을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사회를 좀더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이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각오할 점입니다. 우리가 이 부름에 예라고 대답하고 담대히 이 대가를 지불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아무리 값이 비싸지마는 이 대가를 지불하고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축복이 같이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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