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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3-12/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 /한경직 목사 2014-08-22 23:10:03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十九․六)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주간은 특별히 가정주간을 지킵니다. 또 요새는 결혼식도 많이 있습니다. 가정은 개인적으로 안식과 행복의 원천이요, 또 장래 국민이 자라나는 귀중한 곳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볼 때에 국가의 기본 단위로서 가정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이 가정을 위협하는 사상과 세력도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한국과 같은 전환기에 있는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때 가정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분명히 찾아 마음 가운데 명심하는 것은 매우 필요할 줄 생각합니다. 이 시간은 성경이 교훈 하는 대로 기독교 가정의 기본 원칙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일부일처(一夫一妻)주의의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일남 일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 삼(三)장에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열거할 때에「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일남 일녀가 모여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된 인간은 정욕의 종이 되어서 어떤 문화나 어떤 사회에서나 소위 문명한 사회, 야만의 사회를 불구하고 대체로 일부다처(一夫多妻)주의를 실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일처다부(一妻多夫)주의로 전락된 예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나 로마의 이교 사회를 비롯해서 동양의 유교 사회, 불교사회, 중동 일대의 회교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원시 사회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일부다처주의를 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모세 오경에 가진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기드온이니 다윗이니 솔로몬 같은 여러 사람들이 일부다처주의를 실행해서 많은 죄악을 범하고 그 화를 입은 역사를 우리가 성경 가운데서 읽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일부일처주의의 원칙을 우리에게 재확인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찾아보면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에서 데오도시 황제 때에 비로소 일부일처주의를 국법으로 제정해서 반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제도를 국법으로 제정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인 줄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만하면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회교 국가 이외에서는 대체로 일부일처주의 법으로 신봉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개인으로는 어떤 사회나 비밀리 또는 공연히 일부다처주의를 실행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일부일처주의는 근본적 창조의 질서로서 기독교 가정의 제일 원칙이요. 기독교 가정뿐 아니라 모든 가정의 제일 원칙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하면 먼저 이런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는 부부일신의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께서 들은 성경의 교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막론하고 그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곧 대답하시는 말씀이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 한 몸이 된다고 하는 원칙을 다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한 몸은 나눌 수 없습니다. 불가분리의 원칙을 다시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사람의 의사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준다고 하는 사실을 또한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즉 이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이 곧 대답하시는 말씀이『그것은 너희의 마음이 완악(頑惡) 해서 일시로 허락한 것뿐이지 본래 그런 것은 아니라, 근본 원칙에 의해서 너희는 살아야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제七계명을 범한 이외에 어떤 이혼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원칙, 불가분리의 원칙, 부부 일신의 원칙을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일에 와서 우리 한국에도 이혼과 가정 파탄의 비극이 해마다 증가하여 갑니다. 一九六二년에 이혼 통계를 보니까 법정에 나타난 수대로만 八,八一0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一九六三년에는 九,三二五건으로 五백여 건이 더 증가되었습니다. 이것은 법정에 나타난 수만을 통계한 것입니다. 법정에 나타나지 않은 수를 합하면 그 통계는 얼마나 더 많을지 알 수 없습니다. 통계에 난 대로만 생각하더라도 근 一만(萬)에 이르는 세대가 一년에 가정이 파탄된다고 하면 그 당사자들의 형편은 어떻게 되겠고 그 가운데 출생한 자녀들의 운명이 얼마나 가련한 지경에 빠지겠습니까? 또한 거기에 미치는 사회의 영향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면 결국은 그 형벌을 내가 받고, 내 자녀가 받고, 온 사회가 역시 같이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일부한원오월비상(一婦恨怨五月飛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며느리의 원망을 품는 것이 오월에 날리는 서릿발과 같다고 하는 뜻입니다. 벌이 있습니다. 셋째는, 성결(聖潔)의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가정은 성결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六장 十八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엄하게 교훈 하여 주십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十三장 四절에 이렇게 훈계하십니다.『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가정이 성결히 보전되기 위해서 일곱 째 계명과 이 모든 교훈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이 반드시 성결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하여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시는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귀한 인간의 새로운 생명이 가정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결한 가정은 결혼 전부터 시작이 됩니다. 몸은 성령의 전인 줄 알아서 몸을 성결히 가질 줄 아는 청년남녀로서만 성결한 결혼이 가능합니다. 결혼 전에 다소 교제는 필요하지마는 자제와 극기의 덕이 있어서 인격적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경건한 남녀로만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요사이 미혼 청년남녀들의 소위 무궤도한 교제는 사회의 풍기를 물란(紊亂)캐 함을 물론이요, 자기 자신들의 일생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별히 요사이 소위 가족계획이니 산아제한이니 하여서 각종 피임법의 공개는 물론이고 불법적이요 범죄적인 낙태수술을 항다반(恒茶飯)으로 아는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의 성도덕의 타락은 실로 큰 사회문제요, 도덕문제요, 종교문제입니다. 오늘날 매일 신문 사회면에 나타나는 대로 각종의 비극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현대인의 성도덕의 타락은 현대문화의 기초를 썩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없고 또 이미 이룬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가정이 파괴되니 경건한 자녀가 날 수 없고 난대도 바로 자랄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음란음녀(淫亂淫女)의 소굴이 되고 그 소생으로 충만하게 되니 그 사회는 범죄와 혼란의 도가니로 전락하게 됩니다. 결국은 이러한 사회와 나라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니 만큼 시급히 이런 데서 사회와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경건한 기독교 가정이 요청됩니다. 참된 신앙에 입각한 자제와 극기의 덕이 있고 정조를 생명과 같이 아는 경건한 청년 남녀로서만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또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은 성결히 이루어야 하고 성결히 보전되어야 합니다. 성결이 가정의 기본원칙입니다. 넷째로는, 사람의 원칙입니다. 에베소 五장 二十五절에『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디도서 二장 四절에『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상하며 근신하며 순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이런 여러 교훈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생활 원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의 손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장난감으로 알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또 여자를 만드실 때에 발에 있는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업신여길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 머리의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너무 업신여기면 그것도 곤란하므로 여자가 남자를 주장 못하게 하기 위해서 머리뼈로는 안 만들었다. 그럼 왜 갈빗대로 만들었는가 요? 갈빗대는 몸의 중심에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꼭 평등하게 서로 살라고 갈빗대로 취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갈빗대로 말하면 심장에 제일 가까우니까 남자가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 또 갈빗대는 팔 아래 있어서 살로 덮여 있는데 팔이 그 갈빗대를 잘 보호해 주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잘 보호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옳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등과 사랑의 원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이 꼭 옳습니다. 우리 가정에 있어서의 생활의 원칙은 평등과 사랑으로써 뭉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외국선물을 보니 제목에 꾸쉴러브 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수풀의 사랑이라 하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인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보니 어떤 남자가 멀리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자기 부인이 비행장까지 마중 나왔어요. 여러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자기 부인을 만나니 오죽 반갑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반가울 때 흔히 행동으로 표현을 하니까 자기 아내를 포옹하고 인사는 하는데 얼마나 힘차게 안았던지 그만 부인의 갈빗대가 다 부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남녀간의 사랑은 이런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에 어떤 여자가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내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그런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보면 이 여자가 자기 남편을 잃어버렸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게 않습니다. 자기가 아무개와 결혼할 때에는 참 성인 군자요 좋은 사람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몇 달 살아보니 본래 보던 남편하고는 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본래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고 하는 탄식입니다. 이런 탄식은 부인들만 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혹 어떤 남자들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내가 본래 결혼한 아내는 어디 갔는고?』처음에 결혼할 때에는 그저 자기 남편은 다 영웅으로 자기 아내는 다 천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달 동거하고 몇 해 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해와가 나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해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점점 성질을 알게 됩니다. 점점 까다로운 사람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환멸을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 때가 결혼생활에 있어서 큰 위기입니다. 가정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피차에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경 가운데 사랑 장인 고린도 전서 十三장을 잘 압니다. 四절 이하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오래 참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압니까?「사랑은 온유하며……」친절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七十五세 난 노인이 의사에게 가서 건강진단을 받았습니다. 나이는 七十五세나 되었지마는 진찰을 해 보니 조금도 병이 없습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참 노인 님, 건강하십니다. 그렇게까지 건강하게 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인이 잠깐 생각하더니『비결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요.』『무슨 비결입니까?』그 노인이 천천히 대답했습니다.『제가 지금부터 꼭 五十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五十년 동안을 나의 아내와 지금까지 화평한 생활을 해오는데 맨 처음 결혼한 후에 내 아내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피차에 한 집에서 살 때에는 간혹 성이 날 때도 있겠으니 만일 내가 성이 나면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빨리 주방으로 나가시오. 또 만일 당신이 화가 나면 나는 물 열고 문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겠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고 지금 五十년을 지나고 생각해 보지 제가 참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서 산책을 많이 했더니 이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산책하고 집에 들어오면 집안은 화평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건강해 졌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요?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성나는 일이 있어도 또 어떤 때에 분이 나도 부부간에, 오래 참는 것, 참을 줄 아는 그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친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교훈입니다. 보통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아주 친절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서는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밖에 나오면 아주 참 친절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집안에 들어가서 혹 그 부인에게 하는 걸 보면 도무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내놓고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먼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왜 친절히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가 보통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춥니다. 예절답게 대하고 깍듯이 합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와서는 무례하게 행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고린도 전서 十三장에 보면 사랑은『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의를 왜 안 갖춥니까? 사실은 우리가 어디 가서나『고맙습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많이 하지마는, 그런 말을 많이 할 곳은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이 화평하고 이런 가정이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가정생활의 기본원칙은 사랑입니다. 성서적 의미의 사랑입니다. 다섯째는, 가장 중요한 가정 제단의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건축가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의 중심이 있습니다. 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됩니다. 일본 사람이 집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床の間)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은 적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단에 항상 불리 켜져 있어야 합니다. 불 꺼진 제단을 무엇합니까?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를테면 전도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에 가족 예배를 드리는 제단이 튼튼하다고 하면 제가 이미 말한 일부일처의 원칙이니, 부부일신의 원칙이니, 성결의 원칙이니, 사랑의 원칙이니 하는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이 가정 제단을 쌓지 못한 가정이 있으면 오늘부터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제가 지난주간에 크리스천 센츄리(Christian Century)라고 하는 잡지를 보니까 작년(一九六三년)에 뉴욕시 안에서 살인사건이 五四九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九十一건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보세요! 五백여 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九十一건, 거의 五분의 一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낙원과 지옥의 갈래 길에 언제나 서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지상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타락하게 되면 인간의 지옥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 만들기 원합니까? 성경의 교훈대로 가정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일부일처의 원칙, 부부일신의 원칙, 성결의 원칙, 사랑의 원칙, 제단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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