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38-48/ 성화의 삶 / 한경직 목사
2014-08-22 21:36: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五․四十八)

우리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이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여기에 우리 주님의 대답이 있습니다.『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한 번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 님께 와서『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물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네가 계명을 알지 아니하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네가 살수 있느니라.』

이 때 이 부자 청년이 하는 말이『그것은 제가 어렸을 적부터 잘 지켰는데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그 때에 예수 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댄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후에 나를 좇으라.』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상은 구약에서도 똑 같이 가르치십니다. 창세기 十七장 一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는 말씀이『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신명기(申命記)十八장 十三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 하라.』

사도 바울도 같은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에베소서 四장 十三절에『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골로새서 一장 二十八절에는『우리가 가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 전도와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야고보 장로는 모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 하는 가운데『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온전하고 구비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 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고 우리 사람은 그 손에 있는 진흙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찌그러진 그릇이나 불완전한 그릇을 만들기는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온전한 작품을 만들기 전에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족하고 죄 않고 연약하지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물론 이 온전(穩)全)이라고 하는 뜻을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하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십니다. 그 성결(聖潔)과 사랑이 무한하시고 무궁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는 물론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온전한 것과 같이 사람은 사람으로서 온전 하자는 말입니다.

촛불이 태양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촛불로서 온전한 촛불이 될 수는 있습니다. 작은 앉은뱅이 꽃이 장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으로서 온전한 꽃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최고 목표를 이「온전」에 두라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로 말하면 二十년쯤, 오래 큰대야 二十五, 六세쯤 되면 더 크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속에 있는 도덕적 능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심령은 키와 같이 멎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온전한 사람이 이르기까지 장성하라고 우리에게 권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현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부족하다고 낙심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위대한 표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와 같은 자리로 인도할 수 있으니 우리의 온갖 노력을 다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힘을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일찍이 부르짖었습니다.『내가 이미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일을 행하는데, 그것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노라.』푯대를 향해서 우리는 달음질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를 향해서 우리도 달음질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달음질하는데는 특별히 네 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힘을 써야 될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결의 방면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장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갑자기 변해서 온전히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해야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 하였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중생 한 처음에는 어린 아기입니다. 어린 아기가 장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매일 매일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서 계속해서 장성해서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특별히 죄를 멀리 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행실로 죄를 범하는 것은 물론 말로나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혹은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의식면만 아니고 속에 깊이 있는 잠재 의식 속에까지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악한 것은 모양이라고 버리고 어떻든지 죄를 멀리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몇 공부하다 온 청년이 한 번 찾아와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한 번은 자기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어떤 높은 산에 있는 휴양지에 갔다가 그만 너무 피곤했던지 잘못 되어서 자동차가 전복되었습니다.

부상을 당해서 그 즉시로 이 사람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자기 차데 태워서 어떤 병원에 입원시켜서 사흘 만에야 자기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병원에서 몇 주일 동안 치료하는데 온전히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고 공부를 계속해서 다 마치고 본국에 돌아 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이 청년이 전에 받지 못하였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자기는 이 앞으로 꼭 옳은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쓴다는 그런 말을 하면서『나는 행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마음으로도 내 생각으로도 죄 안 짓고, 꿈에라도 죄 안 짓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합니다.』그만큼 우리가 죄를 멀리 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세상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때때로 죄를 짓습니다. 내 본의는 아니지마는 깨닫지 못할 때 언제 죄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옛날 베드로가 자기의 뜻은 아니지마는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죄를 지었지마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깨달은 때는 그 자리에서 곧 떠나 밖으로 나가 크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인수무과(人誰無過)리요,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허물을 씻고 고치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라고 죄를 도무지 안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곧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떠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점점 성결한 자리로 향상하도록 힘을 써야 마지막에 온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사랑의 방면에서 장성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사람은 다 누구나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생활을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했지만 점점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나와 가까운 사람만 사랑했지마는 나와 먼 사람들도 점점 사랑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만 사랑했지마는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도 점점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처음에는 내 친구들만 사랑했지마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는가 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배워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점점 장성해야 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사랑이란 말은 우리 한국말로는 한 마디 말밖에 없지마는 본래 이 신약이 기록될 때의 헬라 말 가운데 세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남녀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에로스라고 흔히 하였습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의 우정을 필리아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희생적인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에로스에서 필리아로 장성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필리아에서 아가패의 사랑으로 장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서 읽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비를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에게 같이 주는 큰사랑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써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그 지경에까지 올라가도록 간단 간단없이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각 방면으로 우리의 신덕(信德)을 구비해서 장성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성결의 방면 뿐 아니고, 사랑의 방면 뿐 아니고, 각 방면으로 우리의 신덕이 구비해서 원만한 인격을 이루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는 더하고 인내에 경건(敬虔)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화목을 더하고 형제 화목에 사랑을 더하라.』

이 여덟 가지,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화목과 사랑은 음악으로 말하면 마치 여덟 음계와 같다고 합니다.

좋은 음악을 이루자고 하면 여덟 음계가 다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몇 음만 있고 몇이 없다고 하면 원만한 음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점점 장성해서 온전한 지경에 이르려고 하면 이 여덟 가지 신덕을 다 구비해야 그와 같은 자리에 이를 것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넷째로는 우리가 온전 이라고 하는 이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면서 특별히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책임을 맡았든지 어떠한 의무를 맡았든지 온전을 기하도록 힘쓰는 이 정신입니다.

제가 어떤 잡지를 보니까 독일 베를린에 있는 미국 군인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들의 표어가「완전」이라고 합니다.『우리 베를린에 있는 군인은 완전해야 되겠다. 그래서 옷도 결점이 없이 온전히 입고 모자도 똑바로 쓰고 행진을 할 때에도 하나 실수 없이 똑바로 해나가고 모든 것에 온전한 태세를 갖추어 거지고 이 베를린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원수들과 싸우는 우리 십자군들도 온전이 라고 하는 표어를 가지고 내 생활을 바로 잡고 내 실제 생활을 인도해서 언제든지 온전한 임전 태세를 갖추고 사는 것이 우리 십자군의 생활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十六세기의 제일 유명한 예술가, 건축가요, 화가요,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를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찾아가 보니까 꽃을 꽂기 위해서 자그마한 함을 하나 만드는데 아주 정력을 다해서 시간을 많이 들이면서 만들고 있습니다.

구경하던 그 친구가 작은 꽃 함 하나 만들면서 그렇게 시간을 많이 보낼 게 뭐 있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한 예술가가 대답하는 말이『그렇지 않다. 나사렛의 목수가 만일 이 꽃 함을 만든다고 하면 불완전하게 만들 줄 아는가? 허술하게 만들 줄 아는가?

나도 이 꽃 함을 온전하게 만들겠다.』 이 정신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줄 압니다.『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존하라.』

이와 같이 위대한 표준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떠한 책임을 맡았든지 우리도 언제든지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 정신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나사렛의 목수가 작은 함을 만들지라도 불완전하게 만들 것 같습니까? 우리 중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공장에서 어떤 제품을 만들든지 온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있습니까? 공무원으로서 내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공무원만 아닙니다. 군인은 군대에서 그러해야 되고, 교원은 학교에서 그러해야 되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교회의 직분 된 사람은,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내 맡은 책임을 온전히 바로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부산에 계신 채필근 목사님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옛날 그 이가 함경북도 경흥 지방에서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들과 같이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전도하려 다닐 때에, 그 때는 구두가 별로 없고 다 짚신을 신고 다닐 때인데, 신이 떨어져서 짚신을 한 켤레 샀습니다.

본래 짚신이 그렇게 보기 좋은 것은 없어요. 그러나 하루 저녁에 몇 켤레나 삼은 신인지 헐렁헐렁하고 형편없단 말이요. 그것을 한 켤레 사서 이렇게 들고 보는 중에 함께 다니던 선교사가 그 짚신을 가만히 보더니『그 사람이 짚신을 삼지 않고 자기를 삼았오.』하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을 삼고 계십니까? 우리가 무슨 책임을 맡았든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는가에 따라서 결국은 내 인격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우리가 그 점을 마음 가운데 항상 기억합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함부로 하게 되면 결국은 내 자신을 함부로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잘 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잘 할 수 있으면 더 잘 해야 합니다. 더 잘 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가장 잘 할 수 있으면 가장 잘 해야 됩니다. 이것이 완전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깊은 산골에 사는 농부가 산에 나무하려 갔다가 독수리 알을 하나 얻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봄이어서 독수리 알을 병아리 깨우는 닭의 품속에 함께 넣어 놓았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를 까놓았습니다. 병아리가 크는 틈에서 이 독수리 새끼도 점점 큽니다. 병아리 날개가 점점 크는 것을 따라서 이 독수리 새끼의 날개도 점점 큽니다. 병아리는 날개가 있어도 날아다니지 아니하니까 이 독수리 새끼도 그냥 걸어만 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낮에 큰어미 독수리가 그 마당 위에 와서 빙빙 돕니다. 병아리들은 무서워서 다 사방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독수리 새끼는 이상하게도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빙빙 도는 독수리를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가운데 이상한 충동이 올라오면서 자기도 날아볼 생각이 점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날아보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날개가 힘이 있어야지요. 몇 번 푸덕푸덕하지만 날 수는 없었습니다. 큰 독수리는 빙빙 한참 돌더니 도로 면 데로 가 벼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이 독수리 새끼는 나도 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날개를 너울구리면서 날아가는 것을 자꾸 연습합니다. 매일 매일 조금 더 날고 또 좀 더 납니다.

그러다가 열흘쯤 후에 큰 어미독수리가 다시 와서 빙빙 돕니다. 그 다음에는 나도 저렇게 날아보겠다고 날아올라 갑니다. 점점 잘아 올라가니까 큰 독수리는 점점 날아서 내려옵니다.

거의 가까이 오는데 그 다음에는 어린 독수리가 힘이 다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그 때에 큰 독수리가 큰 날개를 가지고 내려와서 어린 독수리를 날개에 업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경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독수리 새끼가 병아리 가운데 사는 것처럼 이 죄악 세상 가운데 살지마는 우리는 장차 올라가려고 하는 이 하나님의 큰 경륜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된 것입니다.

우리도 날아 올라가기 위해서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최대의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성결하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각 방면으로 덕을 구비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물론 우리의 노력으로는 되지 아니합니다.

결국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것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을 거듭할 때에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서 큰 날개로서 은혜의 날개로써 우리를 업어서 마지막에 신령한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형제들아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되면 우리도 그와 같은 줄을 아나니 그것은 우리가 그를 친히 보겠음이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이 높은 이상에 다 도달하지 못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노력하면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 이상에 도달될 때가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영원토록 살 생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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