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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7:22-25/ 알고 통하는 고난/ 조용기 목사 2014-09-22 21:52:03 read : 12054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알고 통하는 고난과 모르고 통하는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고속열차의 공포체험이 있습니다. 이 열차는 캄캄한 동굴로 곤두박질치듯 오르락내리락 달리는 열차입니다. 저는 이 열차를 LA에서 한번, 플로리다에서 한번, 동경에서 한번 탔는데 제일 처음 미국 선교사가 LA에서 자꾸 이 공포의 열차를 타자고 권면을 해서 타고 난 다음 죽을 뻔 했습니다. 그냥 어두운 동굴로 들어가서 쥐어틀고 그냥 곤두박질을 치는데 ‘아이고 하나님 날 살려 주십시오. 내가 살아서 나갈 자신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웠습니다. 두 번째 제가 이 공포열차를 탔을 때는 이제 조금 알았으니까 이쯤가면 곤두박질친다. 이쯤가면 튼다. 이쯤 가면 높이 올라간다. 알고 타니까 좀 덜 하더라구요. 나중에 동경에서 이 열차를 탔을 때는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아무리 요란스럽게 곤두박질을 치고 쥐어 틀고 올라가도 내가 알고 가는 열차이기 때문에 걱정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열차를 모르고 타고 가면은 많은 굽이굽이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불안과 공포에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타면 ‘이것은 이쯤 오게 되어 있다. 또 여기 가면 시련이 오고 시련의 결과는 어떤 것이 다가온다.’ 알고 지나가면 공포에서 해방되고 오히려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도 바울의 로마행
사도 바울 선생의 로마행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군대가 와서 그를 강제로 구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예루살렘 공회당에 많은 대제사장, 사두개교인, 바리새교인, 교법사들이 모인 가운데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심문을 받고 난 다음에 그가 돌아와서 밤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서 그에게 말씀했습니다.
행 23:11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로마로 어떻게 갈지는 모릅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요사이 같이 편안한 기선을 타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돛단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로마에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는 도중에 어떠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바울 선생에게 예루살렘에서 이미 너는 로마에 가서 시저 앞에 서야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 도중에도 고난과 풍랑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면은 결코 풍랑이 다가오지 않고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가는 도중에도 굽이굽이 열 두 굽이가 더 많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풍랑은 인생에 반드시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알고 당하는 풍랑은 안심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모르고 당하는 풍랑은 마음에 큰 고통과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어떤 때는 삶을 포기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선생은 로마로 떠나지만 그가 어떠한 풍랑을 당해도 결코 로마에 도착할 것을 이미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로마로 간다. 지중해의 뱃길이 아무리 험해도 아무리 폭풍우가 불어와도 아무리 고통이 다가와도 그는 로마에는 반드시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기를 그가 로마에 가서 시저의 재판석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은 그를 인솔하는 로마의 군대 백부장 율리오와 함께 많은 다른 죄수들과 배를 타고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미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기 때문에 바울 선생이 “내가 기도한즉 이 배가 큰 풍랑을 만날 위험이 있으니까 떠나지 말고 여기 미항에서 겨울을 머물고 봄에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을 했으나 이 백부장이나 선주가 “아니야, 우리가 바닷길을 잘 알지 네가 무슨 물길을 아느냐?” 그리고 강재로 미항에서 출발해서 그레데 항으로 가서 과동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레데 항으로 가는 중에 육지에서 유로굴로라는 대폭풍우가 불어왔습니다. 엄청난 폭풍우가 불어오매 배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도저히 배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없어서 바람 부는 데로 배를 맡겨놓고 밀려가다가 이틀이 지나매 선원들이 전부 화물을 다 바닷물에 던졌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배의 기구도 다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보이지 아니하고 풍랑은 거세어서 계속 배가 파도에 밀려갑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 절망에 처하고 내일을 알 수 없으면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 배에 탄 모든 군인들이나 선주나 선장이나 죄수들은 하나같이 다 절망했습니다. 살 희망이 없습니다. 하늘이 캄캄합니다. 폭풍우가 요란스럽습니다. 파도가 너무나 거셉니다. 배는 언제 파선되어 침몰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그 배 가운데 탄 사람 중에 마음에 안식과 평안을 가진 사람은 바울 선생이었습니다. 몸은 고달팠습니다. 요동하고 토하고 뒹굴고 먹지 못하고 고통스럽지만 바울은 한 가지 알았습니다. “나는 기어코 로마로 간다.
배가 물에 빠지면 바다 밑을 걸어가서라도 로마에 간다.” 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말씀하기를 ‘바울아, 너는 로마에 가서 로마 시저의 재판석 앞에 서야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러므로 바울은 알고 그 풍랑을 통했습니다.
“아무리 풍랑이 와도 나는 로마로 간다. 그렇기 때문에 배는 파선 당하지 않는다. 온 지중해 파도가 다 덮쳐 와도 배는 파선될 수 없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바울 선생 한 사람만 마음에 안심을 가졌습니다.
그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 침몰하고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희망을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서 또 바울에게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행 27:22에 보면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 27:24 ~ 25에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76명이 그 배에 같이 탔는데 보름동안 풍랑에 시달리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바울 선생이 그들에게 서서 “이 배는 파선되지 않는다. 너희 한 사람도 머리 털 하나도 잃지 아니할 것이다. 담대 하라. 나의 섬기는바 나의 속한 하나님께서 내게 사자를 보내어서 그렇게 확증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바울이 먼저 축사하고 떡을 떼먹으니 모든 사람들이 다 떡을 받아먹고 마음에 안심하고 힘을 얻어서 멜리데라는 섬에 도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도 꼭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을 출발하기 전에 미리 알고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출발하면 가는 도중에 어떠한 물길이 사납고 풍랑이 다가와도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생을 출발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시험과 환난에 파탄이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이가 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그러므로 인생을 알면서 출발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눈도 깜짝 안했습니다.
“바람아 불어라. 파도야 치라. 지중해야 뒤엎어져라. 그래도 나는 로마로 간다.”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멜리데에 도착했는데 비가오고 날이 추웠습니다. 사람들이 덤불을 모아서 불을 피웠는데 바울이 덤불을 주워서 불속에 넣었는데 손에 무엇이 달려서 보니까 아주 무시무시한 독사가 손을 물고 매달렸습니다.
모든 사람들 보고 겨우 풍랑을 통해서 살아났는데 이제는 독사에 물려서 죽는구나. 섬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 틀림없이 살인한 사람이다. 풍랑에서 살아났으나 하나님이 그를 살려놓지 않기 위해서 뱀을 통해서 그를 심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그냥 불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손만 만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바울을 처다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부어서 뒹굴고 죽을 것이다. 아무리 지나도 붓지도 아니하고 뒹굴지도 아니하고 끄떡없으니까 “야, 이것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신!” 보는 눈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왜 독사에 물려도 눈도 깜짝하지 않느냐. 자기는 아무리 독사가 물어도 죽지 아니할 것은 하나님이 로마로 간다고 하셨기 때문에 멜리데에서 독사에 물려 죽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독사에 물려서 죽을 줄 알았지만 바울은 독사보다도 더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멜리데에서 로마로 가야 되기 때문에 아무리 독사가 나를 물고 맹독을 내 몸에 뿜어 넣어도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어떠한 역경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에 믿음과 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절대로 성공적으로 인생을 사는데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딤후 4:17 ~ 18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 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89세의 할아버지 선교사가 뇌일혈로 쓰러져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침상에 드러누워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못하고 또 연세가 89살이니 너무 노쇠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인도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죽더라도 인도해 가서 죽지 미국에서는 죽지 않는다. 나는 기어코 이 중풍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나는 복음을 전한다.” 얼
마나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기 때문에 89세에 그가 중풍이 걸려서 움쩍하지 못해도 그 중풍과 그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중풍과 싸워서 기어코 중풍에서 일어나서 인도 선교사로 도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89살 먹은 스탠리 존스라는 인도의 성자라는 선교사 어떻게 중풍을 극복하고 다시 인도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무리 중풍이 들려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운명을 그는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넬 마리라는 사람은 스탠리 존스의 전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실 때까지 자신이 결코 쉼표를 찍지 않았다.
그의 고향은 미국도, 인도도 아니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자신을 인도의 선교사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뇌일혈과 고령의 나이를 극복하고 선교에 끝까지 힘을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백만장자 4천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어떻게 해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로,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목표를 바라보고 전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에 꿈을 가졌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는 꿈을 가지고 있어 꿈속에서 살았다. 현실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꿈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
“셋째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고 끝까지 참았다.” 뚜렷한 목표와 꿈이 있을 때 그 어떠한 고난도 인내하고 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로 간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시저 앞에 선다는 꿈이 마음속에 영롱하게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시련도 이기고 참고 극복하고 로마까지 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을 알고 살아가는 것하고 모르고 살아가는 것하고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바울 선생이 자가기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풍랑 중에서 낙심하고 죽을 수도 있고 멜리데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 스스로 좌절하고 낙심해서 독사의 독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마음속에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로마로 가게 하신다.’ 시저 앞에서는 꿈이 영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랑이 와도 파도가 쳐도 배가 뒤흔들려서 멜리데에서 맹독을 가진 독사가 물고 늘어져도 꿈쩍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꿈이 분명하고 그는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그렇게 살면 우리가 인생을 성공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요셉의 애굽 행
구약시대 요셉의 애굽 행도 같습니다. 요셉은 두 번이나 꿈을 꾸었습니다. 한번은 들에 나가서 곡식 단을 거두는데 자기 단이 가운데 서고 열한 형제의 단이 둘러서서 절하는 꿈을 꾸었고 두 번째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를 향해서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그 마음속에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참으로 고된 시련과 고난을 당하는 인생길을 살 것인데 그러나 그 결과를 하나님이 꿈으로 이미 심어준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출발한 것처럼 요셉은 형제들이 와서 자기에게 절할 것을 이미 알고 인생을 출발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으나 희망의 꿈을 품고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소소난간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해서 믿음으로 살지 알고 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마음속에 보여 주시면 꿈을 품고 살게 될 때에 우리는 현실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그를 배반하여 마른 우물에 처넣었을 때도 그 마음속에 꿈이 있었습니다. 육신은 현재 마른 우물에 빠져서 좌절과 절망에 빠졌으나 마음속에 언제고 너희들이 나에게 엎드려 절할 것이다.
나는 마른 우물에서 절대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들이 전부 내게 와서 엎드려 절하는 그날이 올 것을 말씀했기 때문에 그날이 오기 전에 나는 죽지 않는다. 마른 우물 속에 빠져도 요셉이 좌절하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 꿈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55: 9에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으므로 하나님의 길을 우리가 미리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생각을 깨달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나가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꿈을 심어 주시기 때문에 꿈을 품고 있으면 마른 우물에 빠져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는 들판에 형들이 죽이기 위해서 마른 우물에 던져 넣었는데 고함을 쳐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그곳에 빠졌어도 요셉은 좌절하지 않은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꿈을 심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렘29:11에 “야훼의 말씀 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종살이 열 한 해 동안 잔뼈가 다 굵었습니다. 종살이의 고달픔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처우와 대우를 받으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고 괴로워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요셉의 마음속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종살이에 이렇게 고달프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우리 형제들이 다 내게 와서 절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길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종국적으로는 형들이 다 내게 와서 절하는 위치에 내가 올라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살이가 자기 인생의 종말이 안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종살이로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매를 맞고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받아도 그는 그 마음속에 꿈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꿈이 없었으면 종살이에서 절망할 수가 있지요. 좌절할 수가 있지요.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꿈이 현실을 다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살이의 고달픔과 고생이 있었으나 가슴에 영롱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길 수 있었습니다.
고전 2: 9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우리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어주신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종살이 11년 만에 가정 총무가 되었으나 너무나 억울한 참소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너무나 억울하게 누명을 덮어 씌웠습니다.
요셉은 아무리 변명을 해야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누명을 덮어 씌워서 요셉이 나를 겁탈하려고 하매 내가 고함치니 웃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쳤더라고 옷을 들어서 흔드니까 누구도 그 보디발 아내의 말을 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억세게 얻어맞고 짓밟히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정치범 감옥소인 시위대뜰 감방에 갇혔습니다.
정치범 감옥소는 너무나 열악합니다. 정치범을 가두는 곳이기 때문에 짐승보다 더 못한 우리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2년 동안 그는 정치범 수용소인 시위대 감옥에서 날을 지내면서도 좌절하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꿈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몸은 정치범 감옥소에서 기약이 없이 죽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언제고 꿈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꿈을 주셨으므로 나는 꿈을 믿는다. 이 꿈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감옥에서 나가게 되고 내 형제들이 내게 와서 절하는 시대가 반드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그는 믿고서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 4: 8~ 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은 그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쥐를 캄캄한 독 안에 넣어두면 3분을 못 견디고 죽는답니다. 그러나 그 독 안에 한 가닥 햇빛을 비추어 주면 무려 36시간을 쥐가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쥐들이 캄캄한 독 속에서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것이 체력 때문이 아니라 절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에 빛이 비추이듯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의 인도 가운데 있으면 캄캄한 독과 같은 곳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이기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살이 2년에 꿈을 품고 지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 감옥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폐인이 되지 않고 살아 일어나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이 다 이루어져서 형들이 나중에 자기 앞에 와서 무릎을 꿇어 절하는 장면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고난당할 때 미래를 아는 꿈을 품고 통과하기 위하여
여러분 우리가 고난당할 때 미래를 알고 꿈을 품고 통과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 선생과 똑같이 요셉과 똑같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저들에게 하나님이 꿈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꿈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긴 사람에게는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마음속에 꿈만은 다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꿈을 품고 인생을 살면 어떠한 역경을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풍랑과 무서운 독사에게 물리는 경험과 요셉이 당한 마른 우물과 종살이와 감옥살이 이런 좌절과 절망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다가올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꿈을 얻습니까?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시23: 4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말씀만 가지고도 우리 마음속에 엄청난 꿈을 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우리의 삶속에 늘 경험합니다. 크고 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니까 눈앞에 환하지 않고 캄캄하잖아요. 내 건강이 나빠져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할 때도 있고 가정에 풍랑이 있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업의 낭패를 당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자녀들이 잘못되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여러 가지 환경으로 내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주께서 함께 하심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꿈입니다. 아무리 너희 인생살이가 어둡고 캄캄해도 캄캄한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주님이 선한 목자가 되어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
소년 다윗을 보십시오. 소년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들판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과 나이 17살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사자나 곰이 달려들어서 양을 물고 갈 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양을 잃어버리면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또 사자와 곰이 양을 물고 가는데 달려들어 이길만한 힘이 없습니다.
불과 17살 되는 소년이 사자와 곰을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래도 저래도 눈앞에 캄캄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다윗은 주께서 함께 계심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사자와 곰이 강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자와 곰에게 달려들어서 양을 빼앗고 달려들면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고 몽둥이로 때려서 사자와 곰을 죽였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통해서 아무리 캄캄한 곳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모든 일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하여 완전히 패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과 그 군대가 골리앗 앞에서 절망하고 벌벌 떨 때 소년 다윗이 그곳에 가서 “내가 가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조차 말렸습니다. “너는 소년이라 골리앗은 어릴 때부터 장군이었다. 그를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 그럴 때 다윗은 말했습니다.
“저 할례 없는 이방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역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둘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셔서 곰과 사자도 쳐서 죽였는데 저 할례 없는 골리앗을 내가 칠 수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십니다.” 사울이 생각하기를 “얘가 돌았나? 자기 정신으로 말하지 않지 않느냐?”
사울도 하나님 믿는 사람입니다. 그 군대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형식적으로 종교적으로 믿었지 실제적으로 현재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현재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종교적으로 의식적으로 믿는다면 사울과 그 군대와 같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올 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에게 밀려서 물 마른 연못의 올챙이처럼 바글바글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은 하나님은 종교적이요, 의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눈에 안 보이는 그 하나님이 실제로 그 자리에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좌절하고 낙심했지만 모세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믿고 의지한즉 그 하나님이 홍해수를 갈라놓고 만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의 도구를 그대로 가지고 물멧돌 다섯 개를 들고 지팡이 하나 짚고 대장군 골리앗을 향해서 나갈 때 자기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골리앗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한 지경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팡이로 인도해 주시고 막대기로 쳐서 구원해 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나가서 골리앗을 물멧돌로 쳐서 죽이고 이스라엘에 대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실 때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써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지팡이와 막대기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써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나왔는데 지팡이는 우리의 길을 여는데 사용하시고 막대기는 우리를 건져주는 능력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눈앞이 캄캄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처해도 내가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믿고 의지하면 그 하나님은 나의 길을 열고 주님께서 나를 구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길을 여시는 하나님,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목자가 같이 계신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둡고 캄캄할 때 우리 곁에 같이 계시므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 1: 9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히 13: 5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인생을 출발하면 풍랑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독사가 물고 늘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살이해도 억울한 누명을 덮어 써도 감옥에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독사에 물린 그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종살이 할 때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감옥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같이 계십니다. 내 눈앞이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 주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 그 자리에서 길을 여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를 받지 않을 것을 알고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가시밭을 지날 때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상적인 상념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공기처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시40: 2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사 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면 모든 고난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다 목적이 있어요. 목적 없이 그냥 다가와서 우리를 후려쳐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고난을 이용해서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며 시험하시고 결국에는 복을 주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목자가 없이 고난을 당하면 우리가 좌절하지만 목자가 계시면서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은 ‘아, 나를 연단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이구나! 나에게 종국적으로 복을 주신다.’는 신념을 가지고 시험과 환난을 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 8:15~16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핑크(A. Pink)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첫째, 광야의 시련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허약한가를 발견하게 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험과 환난을 통할 때 우리는 내가 얼마나 내가 못난 인간이며 내가 얼마나 허약한 것을 알고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자랑하지 않게 하는 것이요, “둘째,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광야의 삶을 통해서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광야를 통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곳이 있어야 시원한 바람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야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하나님을 우리가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우리와 같이 계시면 목자가 우리를 광야를 통하게 하실 때 그를 통하여 우리를 깨뜨리시고 낮추시고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기어코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게 만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목자가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수가 다가오면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해서 사람만 원수가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환경, 괴로운 환경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괴로움과 고통은 밥상을 짊어지고 와서 종국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가 우리 밥상을 짊어지고 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며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미 7: 8에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야훼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잠 24:16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928년 어느 날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플레밍이 현미경으로 배양된 세균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포도상균으로써 아주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치명적인 병을 일으키는 이 병균을 배양해서 병균을 죽일 수 있는 약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플레밍이 아주 2차 대전 동안에 전쟁이 심하고 예산이 없기 때문에 조그마한 방에 유리창도 다 깨어진 연구실에서 현미경 밑에서 포도상균을 잔뜩 배양해 놓고 난 다음 그만 무슨 일로 깜박 잊어버리고 그 균을 그대로 둔 채로 밖으로 나가서 하룻밤을 지나고 연구실에 그 이튿날 돌아오니까 그 포도상균이 잔뜩 있던 유리판자 위에 파란 곰팡이가 완전히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포도상균을 배양하려고 했는데 곰팡이가 와서 실패했구나.’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포도상균이 다 죽었어요. 파란 곰팡이가 와가지고 포도상균을 다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야, 이런 무슨 파란 곰팡이가 이런 저항력이 있어 가지고서 균을 다 잡아 먹는가?’ 그래서 살펴 보니까 그 균이 있는 유리판 위에 유리창이 깨어졌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와서 바깥에서 곰팡이가 날라 와서 붙어서 그 균을 다 잡아 먹어 버렸어요.
박수를 치고 그는 그 파란 곰팡이를 연구해서 배양을 해서 무엇을 만들었느냐. 포도상균을 다 죽이는 페니실린을 만들었습니다. 페니실린이 만들어지자마자 영국의 수상 처칠이 폐렴에 걸렸습니다. 제 2차 대전에 한참 전쟁이 격렬할 때 처칠이 죽었으면 완전히 영국은 망합니다.
그런데 처칠이 폐렴에 걸렸는데 백약이 무 약일 때 플레밍이 만든 이 페니실린을 주사해서 즉시로 포도상균인 폐렴균을 이기고 살아날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와서 “야, 플레밍! 네가 이 열악한 사무실에 유리창도 깨어진 곳에서 연구를 해서 페니실린을 만든 것을 보니 좋은 연구실에서 편안한 곳에서 연구했으면 더 위대한 발견을 했을 것인데…”
그러니까 고개를 흔들며 “너 웃기지 마라. 내가 좋은 연구실에서 편안한 곳에 있었더라면 페니실린을 못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열악한 연구실에서 유리창이 깨어졌기 때문에 다행히 곰팡이가 유리창을 통해서 날라 들어와 가지고서 내가 만들어 놓은 포도상균 위에 올라앉아서 포도상균을 다 죽였다.
그러므로 내가 잘나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유리창이 깨어졌기 때문에 연구를 하였다.” 합동하여 유익을 이룬 것입니다. 열악한 방에 유리창이 깨어진 그 틈으로 곰팡이가 바람에 불어와서 포도상균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페니실린이 발견되어서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폐렴이나 여러 가지 병균에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플레밍에게는 그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의 대표적인 요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그것에 불평하기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은 역경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좋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이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어 절하고 사죄를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당신들은 나에게 해를 행하려 했으나 목자 되신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셔서 그 지팡이로 내 길을 인도하시고 막대기로 나를 구원하셔서 악을 선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함께 계시면 악도 우리를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악이 선으로 바꾸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떠한 풍랑도 우리를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어떠한 독도 우리를 죽이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통도 우리를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어떻게 답답한 억울한 것도 우리를 망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좌절과 절망도 우리를 멸망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30:11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결론]
알고 당하는 고난은 희망과 꿈이 있습니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은 절망과 고통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우리가 알고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의 손에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어서 내가 모르는 길을 열어 주시고 내가 모르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내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담대해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뻐하고 탄식하면서도 감사하고 찬양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길을 갈 동안에 크고 적은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함께 하는 것을 알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와 같이 하는 것을 알고 인생의 고난을 겪는 것과 나 홀로 걸어가고 주께서 같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가는 사람하고의 결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주님을 인정하십시오. 같이 계신 주님을 환영하십시오. 항상 나의 생활 속에 모셔 들이십시오. 항상 모든 일에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눈을 딱 감고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길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이 생각지 못한 구원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알고 인생을 사십시다. 이 진리를 가슴속에 품고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담대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인생을 알고 당하는 고난에는 희망과 꿈이 있지만 모르고 당하는 고난은 절망과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내일을 살아갈 동안에 우리의 결과가 어떤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되시는 주님이 목자로써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축복과 성공과 승리가 되는지 형언할 수 없사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깨우침을 주시옵소서. 영의 눈을 밝혀 주시옵소서. 같이 계신 주님을 영의 눈으로 보게 하여 주시옵시고 영의 귀로 듣게 하여 주시옵시고 영의 감각으로 믿음으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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