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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1-3/ 사랑의 요건 / 조용기 목사 2014-09-05 09:34:16 read : 11590
여러분과 함께 "사랑의 요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에 사랑은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여러분 자연이 태양 빛이 있어야 되고, 공기가 있어야 되고, 물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를 불구하고, 남녀노유, 빈부귀천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모두 다 그 기초가 사랑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들은 사랑이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갖다 준 것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속에 미움을 갖다 준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 분노, 질투, 살인 여러 가지 파괴가 모두 다 사랑의 반대 미움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사랑이 이 세상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갖 세상 방언을 다하고 천사의 말을 다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밖에 안 된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사이 외국어공부에 굉장히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정주부들도 외국어공부를 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외국어공부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그렇게 좁아졌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이제는 지구촌입니다. 비행기만 타면 한 20시간 정도 되면 땅 끝까지 다 갈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세계는 땅 끝에서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땅 끝까지 가고 세계가 하나되는 이러한 지구촌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국어를 많이 말한다는 것은 굉장히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외국어공부 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저도 미국이나 구라파나 세계에 가서 수만 명 앞에서 영어로 설교를 하지만은 그래도 우리 한국말로 설교하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마음에 괴롭습니다.
또 더구나 일본사람들 앞에서 일본말로 설교할 때 아직 일본어의 단어가 충분히 많지 않기 때문에 똑바로 말할 수 있는 것 가지고 빙 돌아가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상당히 괴롭습니다.
외국어를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을 하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말하기를 그렇게 외국어를 잘 하고 또 말이 아주 능변해서 천사같이 말한다 해도 그 사람 자체 속에 사랑이 없으면 괜히 울리는 구리와 꽹과리 밖에 가치가 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오늘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마음에 늘 번민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 직장이 유지될까? 우리나라가 괜찮을까? 경제가 파산하지 않을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여러 가지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하는 능이 있어서 모든 지혜와 지식을 척척 알아서 여러분의 인생문제를 예언으로 척척 해결해 준다면 여러분 그 사람이야말로 아마 신발에 먼지가 묻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람이 아마 그 사람 대문 앞에 인산인해로 설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는 그런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과 비교해 볼 때 만일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그 원천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있는 것을 다 구제해 주고 자기의 몸을 불사르는 데까지 희생적으로 내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사에서 사랑이 모든 무엇보다도 가장 근원적인 기반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3가지 요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3가지 요건이 충족되지 아니하면 제가 뭐라고 말해도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첫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은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동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마음속에 몹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을 이해하고 살려면 자기가 오래 참고 온유한 마음을 갖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다 각각 다른 개체를 가지고 다른 인격을 가지고 다른 교육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꼭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려고 하면 자기본위로 생각하지 말아야 되고 남의 입장에 서서 그 사물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이러한 오래 참고 온유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결혼생활을 해서 잘 압니다. 남자와 여자 벌써 심리적으로 다르고 신체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또 서로 자란 환경도 다른데 부부간에 만나서 오순도순 잘 산다는 거 굉장히 어렵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70이 넘도록 한번도 부부싸움을 안 했습니다.
그렇게 내게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는 불쌍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얼마나 대화가 없었기에 일생을 살면서 부부싸움 한번도 안 했단 말입니까! 여러분 부부싸움 안 한다는 것이 그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만큼 서로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그 말인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고. 그래서 경상도 남자에게 딸 주지 말라는 이유가 집에 돌아와서 세 마디 밖에 안한 답니다. '밥 둬' '애들은' 애들은 잔다 하면 '자자' 이 세 마디로서 끝나기 때문에 경상도 남자들에게는 딸 안 준다 합니다. 나도 까딱 잘못했으면 장가 못 갈 뻔했어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끝임 없이 대화를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의견충돌도 오고 싸움도 하게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해가 깊어집니다. 우리가 옛날에 학교 다닐 때도 친구하고 싸움을 하고 나면 그 친구와 더 친해집니다.
내 경험에도 보니까 우리 집사람하고 싸우고 그 다음 더 인정이 두터워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싸움도 해 볼만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누군 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싸움을 안 했다는 것은 상대가 누군 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결국에 이혼하고 만 부부를 보았는데 내 마음에 대단히 아프게 생각합니다. 남자도 아주 훌륭하고 여자도 인물이 아주 특별히 잘 났어요. 그랬는데 이 청년 남녀를 제가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당분간 돈을 벌어서 잘 살 때까지 아기를 낳지 않겠습니다.
우리 둘이 다 직장을 가지고 열심히 벌어서 크게 잘 살고 난 다음에, 이상적인 가정을 꾸미고 난 다음에 어린아이를 낳아서 우리 가정에 태어난 어린아이는 염려 없이 자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 이상이 좋다' 그러고 기도를 해 주었는데 일년만에 그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이혼하기 직전에 내가 그 가정을 찾아갔었습니다. 좌우간 그 가정에 참 살얼음이 업니다. 좋은 아파트에 둘이 얼마나 부지런히 돈을 벌었는지 젊은 부부가 일년 여 뼈가 빠지도록 돈을 벌어서 가정에 있을 것은 다 있어요.
그런데 가니까 남편은 응접실에 있고 부인은 침실에서 서로 봇짐을 다 이미 꾸렸어요. 이제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저를 오라고 해서 제가 가서 마지막 중재를 서 보려고 애를 썼는데 남편 말을 들으니까 남편이 뭐라고 하냐면 '목사님, 이런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잘 살겠다고 해서 자기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나는 직장에서 하루종일 고달프게 뜁니다. 점심조차도 돈을 아끼려고 집에서 싸간 도시락을 먹어가면서 뛰는데 저녁에 오면은 자기는 병원에서 일하고 지친다고 밥도 안 해 놓고 드러누워서 잡니다.
나는 직장에 갔다 오면 마누라가 자고 있어요. 부엌도 서늘하고 밥도 안 해 놓고 그러니 내가 직장에서 늦게 돌아와서 부엌에서 덜거덕 덜거덕 하고 밥을 해 먹으니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년을 계속 합니다.
아니 세상에 무슨 마누라가 이런 마누라가 있습니까? 마누라면, 결혼했으면 집안에 밥도 짓고 남편하고 오순도순 하고 살아야지 항상 피곤하다고 저녁에 와서 드러누워서 자고 혹은 밤일한다고 밤에 들어오지도 않고 혹은 남편 없을 때 낮에 와서 혼자 자고 저녁에 나가버리고 이게 뭡니까?'
그러니까 부인이 방에서 화들짝 뛰어나오더니 '목사님 한 쪽 말만 듣지 마십시오. 나도 할 말 있습니다. 왜 우리 둘이 결혼할 때 오순도순 돈 벌어서 잘 살기로 하고 서로 직장을 가지기로 하고 바로 이 남자가 날보고 직장을 가지라고 강요했습니다.
나는 사실 결혼하고 난 다음에 직장 없이 남편이 벌어다 준 돈 가지고 집에 편안히 살고 싶었습니다. 목사님 간호사로 일한다는 게 쉬운 줄 압니까?
밤낮으로 찌푸린 환자들 돌보고 그 상처 치료하고 지칠 대로 지쳐서 집에 오면 온 몸이 노곤해져서 도저히 집안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집에 일하는 파출부 아줌마 하나 두자고 해도 돈 든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호통을 치는 남편이 내가 지쳐서 밥 못하고 쓰러지면 자기는 손발이 없나요 왜 밥을 못해 먹어요.
자기만 돈 버나, 나도 돈 버는데 꼭 여자만 그래 밥하고 집안 청소하라는 이유가 어디 있어요 자기도 손발이 있는 이상 왜 자기가 일찍 와서 따뜻한 밥 해 가지고서 아내에게 밥 좀 대접해주고 청소 좀 해 주지' 그러니까 '뭐 어쩌고 어째' 그러고 둘이 삿대질하고 또 전쟁이 벌어졌어요.
내가 보니까 두 사람이 모두 다 개인적으로 하는 말은 다 올바른 말인데 남편 말을 들으니 그 말이 옳고 부인 말을 들으니 그 말도 옳고 내가 어떻게 심판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둘은 마음속에 강하게 결심을 하고 상대방을 이해 안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조금만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 주었으면 그 가정이 파괴 안 되었을 것인데 남편 한 사람 부인 한 사람 볼 때는 참 좋은데 그 두 사람이 절대로 이해를 안 하기로 결심을 했어요. 내가 그렇게 타이르고 기도해 주고 해도 이해를 안 합니다.
결국 그 가정은 깨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이 자기 입장만 세우고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면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입장에만 서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또 오래 참고 온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해 주는 것입니다.
다 그러면 이해하라고 해서 그만 도적질하고 살인하고 범죄 하는 행위도 다 이해하고 도와주라는 것이냐?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충분히 알아서 그것을 동정하고 도와주기 위한 것이지 범죄에 가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보았었습니다.
어느 사형수가 사형을 받기 전에 어머니를 꼭 만나겠다고 어머니 면회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마지막 죽기 전에 어머니 보겠다니까 철창에 갔습니다.
'아이구 내 아들아, 이 일이 웬일이냐'고 우니까 '어머니 내가 그 손 좀 만져보고 내가 죽겠다'고 해서 철창 안으로 손을 넣어주니까 어머니 손을 꽉 잡더니만 그 손을 입에 넣어 가지고서 그 손가락을 바짝 깨물어서 손마디 몇 개가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입에 막 피를 흘리면서 어머니 손을 깨물었습니다. 어머니가 막 나 죽는다고 비명을 치고 손을 빼내면서 '이놈아 죽어 가면서 환장을 했냐'고 하니까 '어머니 내가 지금 철창에서 사형을 받게 된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압니까?
내가 어릴 때 이웃에 가서 남의 물건을 훔쳐오면 그래서 그 사람에게 들키면 어머니가 앞을 막고 뒤를 막고 내 훔치는 것을 변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훔쳐온 거 안 들키면 엄마가 모른 체 해줬고 들키더라도 앞을 막고 뒤를 막아 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자랄 때에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참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그때 어머니가 심하게 나에게 종아리를 때려주고 꾸짖어 주고 내가 남의 물건 훔쳐올 때에 들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고 그 사람에게 갚아주고 매를 맞게 했으면 내가 오늘 이 사형을 안 당했을 것인데 나를 죽게 한 것은 어머니가 나를 과보호했기 때문에 죽게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대단히 마음속에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이해해서 도와주는 것이지 그 잘못조차도 이해해서 그래 좋다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식 키울 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가 너무 좋기 때문에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아이구 내 손자해 가지고서 애를 버려 버립니다. 자식은 부모가 딱 길러야 돼요. 채찍을 들고 길러야 돼요.
이러므로 이해라는 것은 반드시 여러분 그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조차도 그것을 이해해서 조장해 주는 그런 것은 이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라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비평하고 판단해서 정죄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잘 들어주고 그리고 최대한도로 그 사람을 이해해서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이러한 아량을 가진 것이 바로 이해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결혼생활을 하고 사는데는 남편과 아내 서로서로 이해하고 사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일시적으로 무슨 뭐 분이나 사다주고 양말이나 사다주고 그리고 아이 러브 유하고 돌아선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철저히 서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서로서로 상대방을 이해해 주고 그 이해의 바탕에 서서 믿어주는 이러한 것이 참사랑인 것입니다. 이해가 없는 것은 시베리아벌판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서 주님은 놀라운 이해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여섯째 남편하고 삽니다.
온 동네가 다 음란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고 교제를 안 하기 때문에 물은 아침에 길으러 오지 대낮에 물 길러 안 오는데 사람들 얼굴을 피해서 정오 대낮에 뙤약볕이 비치는데 물을 길러왔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인을 만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그 여인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그 여인에게 대화를 거는지 보십시오. 보통사람 같으면 세상이 다 아는 여자니까 '여자여 당신은 음란한 여자요 당신은 방탕한 여자요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해 그 길로 가면 멸망당해' 아마 그렇게 정죄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 여자는 당장 자기 변명을 하고 달려들고 그냥 대결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는 했으나 그 죄에서는 나오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내게 물을 좀 주시오' 이 여자는 깜짝 놀랐었습니다. 왜냐하면 더구나 유대민족은 사마리아사람하고 상종을 안 합니다.
개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사람을. 더구나 남녀유별한데 남자가 대낮에 여자에게 우물가에서 혼자 있는데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찌하여 당신이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싱긋 웃으시면서 '물을 달라하는 그 사람이 누군 줄 알았다면 당신이 도로 먼저 물을 달라 구했을 것이요 그 사람이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주었을 것이다' 여자가 하는 말이 '흥 웃기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이 우물은 깊고 당신은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에서 그런 생수를 길러다가 내게 준단 말입니까?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크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주어서 그 자손들과 그 후손들이 다 마시는데' 예수님께서 '여자여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다' 이거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네가 인생이 목말라서 남편을 하나 둘도 아닌 다섯을 갈아치우고 여섯째 갖다놓았지만 또다시 만족이 없다. 목마르다. 세상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르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가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만 귀가 솔깃해서 '그럼 주님이시여 나에게 그 물 좀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대낮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니까 예수님이 '그래 내가 그렇게 해줄 테니까 남편을 데리고 오너라' 여자가 고개를 숙이면서
'나는 남편이 없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는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다 이혼하고 이제 여섯째 사는 것은 네 남편이 아니다' '아! 이제 보니 당신 선지자군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당신 자신이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나타내고 이 여자를 예수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구원을 받자 말자 물동이를 버려 두고 사마리아로 달려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막 온 동네에 소문을 내서 사마리아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충분히 동정할 수 있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도 아픈 곳을 눌러서 깨뜨리지 아니하고 그를 잘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 살벌한 세계 속에서 서로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해도 내가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 않는 이상 사랑은 사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요소는 동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정이라는 것은 아픔을 함께 당하고 위로의 손길을 베푸는 것이 동정인 것입니다. 성경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좋은 이웃에 대해서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갔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성전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데 여리고는 저주가 있는 곳입니다.
세상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타락의 길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실컷 얻어맞고 있는 것 다 잃어버리고 옷도 다 벗겨지고 피투성이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도움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제사장 한 사람이 부지런히 그 길로 내려옵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이여, 제사장이여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부르짖으니까 제사장이 곁에 와서 보고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대표합니다. 여러분 율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만 하지 사람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자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조금 있으니까 레위사람이 내려옵니다. 레위사람이란 것은 교회의 여러 가지 치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막을 치고 또 성막을 거두고 성막 안을 치장하는 이러한 종교적인, 의식적인 사람입니다. '레위사람이여, 레위사람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레위인도 와서 그 사람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왜? 그는 종교나 의식을 집행하면 되었지 사람 개인에 대한 동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의 율법주의자들은 법으로 심판만 하지 절대로 앓고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동정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의식주의자들은 종교나 의식만 집행하면 되었지 개인에게 동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이리저리 여행하던 중에 이 사람에게 와 보고 이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는 것을 보자 빨리 그 사람에게 가까이 와서 자기 짐승에서 내려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와 기름을 그 상처에 붓고 붕대로서 감고
그리고 그를 짐승에 태워서 주막집에 갖다 주고 자기가 돌보고 난 다음에 은전 두 닢을 주면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들었으면 내가 갚아주겠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여러분 실제적으로 고통을 함께 하고 동정하는 것입니다. 멀리 서서 너 잘못한다고 심판하는 것은 그건 율법주의자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든지 장엄한 교회를 세우고 장엄한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것 이것은 하나의 레위인적 종교적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실제로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고통을 함께 걸머지는 동정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말이 쉽지. 남을 비평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여러분 제가 옛날에 개척할 때 제가 그 겨울에 춥고 어려울 때 밤에 겨우 몸을 녹이고 있는데 갑자기 밤중에 사람 죽는다, 사람 죽었다, 지금 숨이 넘어간다, 빨리 오라고할 때 마음에 굉장한 갈등이 다가옵니다.
아예 죽으면 죽으라고 하지 지금 내가 추워서 겨우 몸 좀 녹이고 자려고 하는데 이 밤중에 오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그런 갈등을 많이 느꼈었습니다. 그럴 때 내가 늘 마음속에 네가 정말 교역자로서 사랑을 했느냐? 사랑은 입술로 말하기는 쉽지만은 실제로 실천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한 부부가 전라도에서 올라와서 남편이 목수노릇을 하면서 생활합니다. 남편이 목공을 해 가지고서 부인하고 졸망졸망한 아이들하고 생활을 합니다. 조그만 단칸방에 살았는데 그 부인이 우리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암이 걸렸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밤중에 나에게 남편이 죽는다고 오라고 해서 최자실목사님 하고 가니까 아! 조그만 단칸방에 이불도 누더기에 애들은 올망졸망 있는데 부인은 초췌해서 그 남편을 잡고 '여보 당신이 가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며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 그 남편이 차마 눈을 못 감아서 죽으면서도 하는 말이 '나 예수 믿고 천당 가서 기다린다. 너 예수 믿었으니 하나님이 돌보아 줄 것이 아니냐 너무 이렇게 하지 마라 너무 슬퍼하니까 내가 천당 길도 못 가겠다' 그러면서 우리가 찬송 부르는 가운데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 그 단칸방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최자실목사님 하고 나하고 그것을 두고 올 수가 있어야지요. 나는 집에 돌아오고 싶은데. 그 부인이 뭐 초상 치를 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혼자입니다.
그래 그 다음에 시체를 옆에다 밀어놓고 시체 옆에 내가 앉고 그 다음에 최자실 목사님이 앉고 그 다음 그 부인이 앉고 그 다음은 애들이 있는데 나는 너무 지쳐서 어찌하다가 드러누운 거 같습니다. 드러누웠는데 자다가 보니까 사람이 그렇게 찰 수가 없어요.
죽은 사람이 그렇게 차요 얼음장같이. 뭐가 굉장히 차서 보니까 시체하고 얼굴을 딱 붙여 가지고 자요. 너무 좁으니까 시체하고 이렇게 팔을 끼고 자는데 얼굴을 딱 대고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못해요. '억' 하고 내가 놀랐는데 그렇게 얼음장 같이 차대요.
그때 나는 여러 번 느꼈습니다. 말로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고락을 같이 걸머진다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이것이 우리 사람들이 늘 느끼는 갈등입니다. 입술로서 '사랑하자, 사랑하자' 하면서도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본위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과 괴로움을 동정하고 짊어져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해와 동정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희생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희생의 결단을 하지 않고는 여러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타인을 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가 전력을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사랑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 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희생의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올 필요가 없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그러나 여러분과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당신이 희생의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은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저가 상하고 저가 찢기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인생보다 못하게 처참하게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대신 갚아서 여러분과 나를 구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거 사랑 아니고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은 말하기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했습니다. 징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서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해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쫓겨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모든 하나님과 원수 된 담을 헐어버리고 그리고 모든 저주를 짊어져서 그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희생의 결단이 아니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로마의 군인들에게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것은 여러분과 나의 질병을 짊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희생의 결단이 아니면 왜 예수께서 우리의 질병을 당신의 몸에 걸머지고 그렇게 상처 입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 허물로 말미암아 상처투성이요 그의 몸도 상처투성이요 그의 존재 전체가 십자가에서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공시키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예수 십자가에 나오면 그 앞에서 우리가 영원히 죄사함을 받을 수 있지요.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서 성령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입을 수 있지요.
십자가 밑에 나와서 우리는 귀신에게서 놓여남을 받고 우리는 건강을 얻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병 고침 받는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지요
.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낭패와 실망과 저주를 벗어나고 가시와 엉걸퀴를 발로 밟고 일어나서 '나도 잘 살 수 있다' '나도 성공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는 담대한 능력을 갖고 불가능에 도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나와서 죽음이 오더라도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의 결단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이란 것은 희생입니다. 사랑이란 것은 '내게 주시옵소서'하며 내 편에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서로서로 희생할 때 사랑인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 그러면 나라를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면서 받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 사랑이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 사랑이란 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아무리 사랑을 해줘도 사랑을 받고 또 그 사랑을 돌려주지 않으면 사랑은 외마디 부르짖음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 몸을 찢고 그 피를 쏟아서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랑에 반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로서 허공에 메아리 치고 말 것입니다.
이 사랑이 사랑으로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감동되어서 우리가 또다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때 이것이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편지를 하나 받았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편진데 목사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어떤 친구의 소개로 대학 다닐 때 외국에서 온 지금의 남편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남편하고 결혼하고 외국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시동생이 많은데 그렇게 얼음장 같이 냉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서 알은 것은 남편이 간질병환자라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남편이 눈을 뒤집고 온 몸을 비틀고 고함을 짐승같이 지르고는 온 옷에 오줌을 다 싸놓고 변을 다 싸놓습니다. 나는 부잣집 딸로서 고이고이 자랐는데 내 손으로 내 눈을 찌른 것이지요. 내가 이 남자가 좋아서 부모님이 반대하는데도 시집을 가서 이 외국에 와서 살았습니다.
나는 그 고통 가운데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 테이프를 누가 전달해 주어서 그것을 받아서 듣고 난 다음에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고 사랑을 하기로 했는데 우리 남편은 줄담배를 피웁니다.
밤에 이불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줄담배를 피우니까 온 방에 연기가 가득하고 나도 기침을 하고 우리 갓난아이도 기침을 하는데도 한시도 입에서 담배를 떼 놓지 않고 줄담배를 핍니다. 그리고 직장에 가서 늘 쓰러지니까 돈벌이는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직장을 얻어 가지고 돈벌이를 해야됩니다. 우리 시집은 잘 삽니다.
시집은 잘 살고 시집의 형제들도 잘 사는데 한푼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난 다음에 내가 결심을 하고 희생을 하리라고 작정을 했으므로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했습니다.
새벽 일찍 나가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서 집안청소 다하고 밥 차려서 남편 자식들 다 먹이고 하는데 이제는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님 사람이 이렇게 일방적으로만 사랑하고 살 수 있습니까? 나는 내 영도 마음도 몸도 연약한 여자로서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집세도 빌려서 아직 못 내고 있고 내가 움직이지 아니하면 이 가정이 살수가 없는데도 남편이라는 사람은 나에게 너 수고한다고 등이라도 한번 두들겨 주고 나 한번 품어주고 나 한번 위로해 주면 좋겠는데 나에게 밤낮으로 돈 많이 안 벌어온다고 고함고함을 치고 담뱃값 떨어졌다고 고함을 치고 불끈하면 손으로 막 때리곤 합니다.
목사님 나는 이제 이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의 답을 기다립니다. 이로서 내 인생을 결정지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목사노릇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그 답을 못 쓰고 있습니다. 내 한가지 답에 그 부인은 이제 그 남편도 자식도 버리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나의 운명을 목사님의 편지로 결정짓겠다. 여러분 여기에서 내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한편에서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서로 주면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또 줘야 됩니다. 사람이 여러분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고 서로 사랑이 부딪치면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불쌍한 여자도 그 남편이 '여보, 내가 이 간질병을 앓아서 당신 못 도와주니 이 내 참 죄송하기 짝이 없다.
내 이 좋아하는 담배도 끊겠다. 내가 집안일 돌봐 주겠다. 당신이 그렇게 교회를 좋아하니 교회도 가겠다' 교회 간다고 막 때린답니다. 위로 받겠다고 교회 간다고 막 때린답니다.
그러나 '여보 당신이 교회 좋아하니 내가 교회 따라가겠다' 이러면 이 부인이 못 버리고 달아나요 달아나고 싶어도. 내가 달아나면 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노. 그래도 나 없으면 못 살겠다고 사랑해 주는데 콧등이 시큰해져 가지고서 내가 뼈가 부서지더라도 살아보겠다 할텐데.
아 그냥 사랑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담뱃값 내놓으라고 줄담배를 피고 주먹질하고 교회 간다고 때리고 늘 불평하고. 아 나는 내 딸 같으면 벌써 데려왔어요. 벌써 데려왔지요.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앞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증명된 사랑입니다. 말 사랑이 아닙니다. 이처럼 그 아들을 주시까지 증명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증명된 사랑입니다.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주었는데 우리가 그 사랑을 받고 난 다음에 우리 주님께 그 사랑에 반응하지 아니하면 여러분 하나님도 낙심합니다.
사랑이란 상호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해서 우리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물질 드리고 시간 드리고 몸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셔서 더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이요 또 우리는 더 사랑할 것이요 그 속에 행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속에서 비로소 신뢰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신뢰할 때 희망이 다가옵니다. 희망이 있을 때 사람이 기뻐집니다.
사람이 기쁠 때 사람은 행복해 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뢰도 없고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고 이 세상에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을 산처럼 쌓아 놓는다 하여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삶의 의미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말씀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일생을 살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볼 문제입니다. 얼마나 지위가 높으냐 명예가 많으냐 돈이 많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일시적인 로맨틱한 연애감정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연애감정의 사랑만큼 몰인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랑이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이해하고 동정하고 희생하고 그리고 사랑을 받은 대로 그 사랑을 갚아주는 이와 같은 요소가 충족될 때 참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 오늘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생활을 하면서 여러분의 부부 상호간에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까? 내 편에만 서서 생각하지 말고 서로 깊이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까?
또 서로서로 상대방의 아픈 것이 있으면 서로 동정하고 서로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려고 하고 사랑의 희생의 결단으로 내가 희생하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을 살리고 그 성공하고 도와주겠다는 이런 일념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만 잘 되면 되니까 나만 먹고 나만 마시면 된다는 이런 이기주의가 있습니까? 내가 사랑 받은 대로 사랑을 돌려주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볼 문젭니다.
이러한 문제가 이루어 질 때 여러분 개인도 가정도 생활도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위대한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온 인류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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