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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3:5-13/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 한경직 목사 2014-08-27 11:38:35 read : 14429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고린도후서 13장 5절 상반절을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신 교훈 중에 한 마디올시다. 이 교훈은 언제나 어디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슨 물건을 살 때에도 잘 시험하여 보고 삽니다. 사람을 쓸 때에도 잘 시험하여 보고 그 사람을 씁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시험하여 보는 것은 흔히 등한히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경고하신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느냐? 그것은 내 자신을 시험해 보지 아니하는 까닭입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세 가지 방면으로 시험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내 자신을 바로 아는가? 둘째는 내가 내 자신을 바로 다스리는가? 셋째는 내가 내 자신을 주님의 말씀대로 부인하는가? 이제 하나씩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내가 내 자신을 바로 알고 사는가? 내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헬라 철학자들이 청년들에게 항상 충고한 말 가운데 하나는 “네 자신을 알라.” 그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 가운데도 증자와 같은 이는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하노니’, ‘날마다 내 몸을 세 번 살피노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은 어떤 분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하느니라 ‘나를 알고 적를 알면, 원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길 수가 있다.’고, 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는 말씀이올시다.
우선 자신의 건강도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결핵, 암, 고혈압 같은 중병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봉변을 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종합 진단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영적 상태도 바로 아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권고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사도신경을 외웠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 그 밖에 여러 성경의 진리를 믿습니다. 우리가 사실 이 모든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령의 증거가 우리 맘 속에 있는가? 믿음의 열매가 있는가? 생활에 변화가 있는가? 마음에 기쁨과 화평이 충만한가?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대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기는 나가지만, 믿음은 없어요.” 이런 말을 듣는 아버지가 혹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혹 이와 비슷한 말을 듣는 어머니는 없습니까?
이런 말도 이따금 들리지요. “어떤 부인은 교회에 나가기는 나가지만, 그 며느리에게 대해서 행하는 행동을 보면 믿는 것 같지 않다.” 이런 시어머니는 없습니까? 또는 그 반면에 “어떤 여자는 교회에 나가기는 나가지만, 그 시어머니에 대해서 하는 행동을 보면 믿는 것 같지 않다.” 이런 말을 혹 듣는 며느리는 없습니까?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이지만, 세 가지 방면에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보는 내 자신에 대한 견해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이가 보는 내 자신에 대한 견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내 자신에 대한 견해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잘못 보는 때가 더러 있습니다.
사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때가 더러 있습니다. 다른 이가 내 자신을 나보다 더 바로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물론 다른 이의 견해도 잘못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그 점이올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39편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 앞에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직면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와 반성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허물과 죄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 자신을 알고, 회개할 것을 매일 회개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내가 내 자신을 바로 다스리는가, 시험해 봐야 합니다.
내 자신을 알 뿐더러 내 자신을 바로 다스려야 합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쳐서 빼앗는 장사보다 낫다고 했어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수에게 패망한 자의 무덤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스스로 패망하는 자의 무덤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같은 이도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여기에서 절제라는 말은 문자대로 말하면 자신을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운동 선수마다 승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런 선수라야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는 이렇게도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한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제어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 신앙생활은 물론, 어떤 방면에서나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특별히 다음 몇 가지 방면에서 자신을 다스리라고 권고합니다.
첫째는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식욕, 정욕, 물욕, 권세욕, 허영심 등등일 것입니다. 잠언 25장 16절에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경계합니다. 꿀이 아무리 달아도 과식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병입니다. 자신의 식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23장 29절 이하에는 이런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이런 말로 경계합니다. 자신의 식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독사같이 쏘는 것을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보니 작년 1년간에 우리나라에서 쓴 유흥비 총액이 900억을 넘었다고 합니다. 바로 어제 신문에 보니 담배를 먹는 사람들에게는 폐암 발생률이 담배 안 먹는 사람보다 2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담배 가운데에서 다른 어떤 독소를 발견하였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청년들 학생들까지 술과 담배는 그냥 먹고 마시고 피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식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욕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서 13장 13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계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그 뒤에 무슨 말씀 있는지 압니까?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조 시대에 소위 궁중에는 수다한 궁녀들이 있었는데, 임금의 첩은 소위 후궁이 무엇이니 해서 여덟 가지 계급, 여덟 가지 종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옛날 한국의 소위 궁중은 음란하고 부패하였던 것입니다.
궁중뿐이 아닙니다. 소위 동방예의지국이란 한국의 유교 사회는 소위 출세한다는 사람은 첩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음탕한 사회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끄러운 전통이 있는 사회에서, 또는 퇴폐한 외래풍조가 물결처럼 밀려오는 이런 시대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을 바로 다스려서 깨끗한 생활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는 성경은 언제나 물욕에 대해서도 경계합니다. 물론 물질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나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지적합니다. 물론 돈이 여러 가지 일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계합니다.
물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성경은 안목의 정욕, 곧 허영심에 대해서 항상 경계합니다. 사치, 유행, 퇴폐적인 사회풍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복이나 음식이나 기타 모든 생활에 있어서 내 자신을 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유행이라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신의 감정도 바로 다스리라고 우리에게 경계합니다. 잠언 14장 17절에 보면,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감정을 다스리란 말입니다. 시편 37편 8절에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전에 헬라에 유명한 알렉산더대제 같은 이는 일시의 분노를 참지 못해서 자기 일생의 친구요, 또 자기 부하로서 가장 유능한 대장이었던 클리터스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후회와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가 당시에 천하를 정복했지만, 그 자신을, 자신의 분노를 제어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큰 실수와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 곧 희로애락 모든 방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분노와 슬픔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성경은 언제나 혀를 다스리라고 경고합니다. 시편 34편 13절에 보면,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경고합니다. 혹은 잠언 13장 3절에는,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경고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혀는 곧 불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자신의 혀, 곧 말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혀를 바로 다스리지 못하므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날 때 많습니다. 사회에도 분쟁이 일어날 때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말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까닭으로 때때로 분요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운전수가 한시라도 그 자동차를 다스리지 못하면 어떠한 사고가 일어날지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말하자면, 내 자신이라고 하는 차의 운전수입니다. 내 자신을 언제나 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내가 내 자신을 부인하는가? 시험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도 결국은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 말씀도 역시 자신을 부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신앙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못 박혔다고, 그러니 죽었단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그 옛 자신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아주 죽었고, 그 다음부터 그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겁니다.
참된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자기 중심인가, 혹은 그리스도 중심인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생활이란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사업을 하지만, 한 사람은 자기를 중심해서 자기를 위해서 그 사업을 합니다. 똑같은 사업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사업을 합니다. 같은 일과 같은 봉사를 하지만,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그 일과 그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그 일과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미를 먼저 구합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에게 속하는 모든 것, 재능이나 시간이나 물질을 언제든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용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첫째는 자신을 바로 아는 생활입니다. 자기의 허물을 깨닫고 항상 반성하며 회개하는 생활입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모든 방면에서 바로 다스리는 생활입니다. 셋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아주 부인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이것은 물론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심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능치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중심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신앙생활의 비결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서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시험해서 내가 과연 내 자신을 바로 아는가, 내가 과연 내 자신을 바로 다스리는가, 내가 과연 내 자신을 부인하는 참 신앙생활에 들어왔는가, 시험해 볼 수 있는 이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실 때에만 이런 생활이 가능한 줄 저희들이 압니다. 오, 성령이시여! 이 시간 우리 각 사람 마음 속에 충만히 임재하셔서 내가 내 자신을 바로 보며 바로 다스리며 온전히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크신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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