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2:3-21/ 동정심 / 한경직 목사 2014-08-26 22:11:02 read : 1422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으로 11장까지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가르친 교리편이요, 12장으로 16장까지는 실제 생활에 대한 교훈, 곧 도덕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도리를 다 가르친 후에, 12장부터는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 권면을 주는 가운데 15절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기쁨과 슬픔은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이올시다. 이 경험에 동참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쁨과 슬픔을 같이 느끼는 생활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같이 느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동정’ 혹은 ‘동정심’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이 동정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동정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에 동정이 있습니다. 시편 103편 8절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가르칩니다. 같은 편 13절에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불쌍히 여기시는 동정의 하나님이올시다.
이사야 58장 6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높은 데 계시나 낮은 자를 살피시며, 눌린 자를 돌보시고,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시는 동정의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63장 9절에는,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시는 동정의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크신 동정심은, 그로 하여금 독생자이신 예수까지 이 세상에 보내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의 전생활은 오직 동정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슬픔, 인간의 고통, 인간의 죄로 인한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그는 모든 가족과 여러 친구 가운데서 같이 우신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장차 올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식하셨습니다. 동정의 눈물입니다. 그는 병자들을 동정하여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주린 자들을 동정하여 먹을 것을 주셨고, 세리와 죄인들을 동정하여 그들과 생활을 같이 하시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인의 죄에 동참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슬픔에만 동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쁨에도 또한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셔서 같이 즐거워하셨고, 여러 번 연회에 초청을 받아서 인간 생활의 기쁨을 또한 같이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일생은 동정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동정의 생활을 하라고 권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3장 3절에는,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갇힌 자, 학대받는 자를 동정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을 동정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는 동정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동정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풍부해야 합니다.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도적인 사회 운동이나 인도적인 사회 기관이 기독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동정하여 병원이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것입니다. 고아를 동정하여 고아원이 세워졌고, 맹아를 동정하여 맹아원이 생겼으며,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동정하여 경로원이 설립되었고, 상이군인을 동정하여 적십자사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한 몸에 붙은 지체들입니다. 한 몸에 붙은 지체들은 동고동락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배달민족이라는 한 혈통에 속하였습니다. 한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는 남북을 가릴 수 없습니다. 동고동락해야 합니다. 조금 넓게 생각하면 우리는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세계 인류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세계 인류와 같이 동고동락하는 동정심을 넓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동정은 생의 원칙입니다.
동정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또한 장성하게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 생활에는 불의의 재난, 슬픔, 고통이 많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피차에 동정으로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자들과 같이 즐거워할 때에 그의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곧 갑절이나 더하여집니다. 또 그런 즐거움에 동참할 때에 나에게도 즐거움이 커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비유에도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친구들을 향해서 나와 함께 즐기자고, 같이 즐겼습니다. 돈을 잃었던 여자가 그 은전을 찾은 후에 또한 친구들을 향해서 나와 함께 즐기자고 이웃과 같이 즐긴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그 아버지는 큰 잔치를 배설하고 이웃을 청하여 같이 즐거워하였습니다.
또 반면에 슬픈 일을 당할 때에 그를 동정하여 같이 슬퍼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슬픔이 반감이 됩니다. 곧 절반이나 감소가 됩니다. 문자 그대로 같이 우는 친구가 그 슬픔을 나누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합니다. 그 슬픔을 나누어 가는 그 자신도 위로를 받고, 그런 심령은 더욱 장성하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사실 고독한 경험이올시다. 사실 그것을 당하는 나만 압니다. 그런데 그 슬픔과 고통의 몇 분지 일이라도 알아주는 이가 있으면, 같이 아파하는 이가 있으면 그만큼 그 고통이 덜어집니다.
그러므로 동정은 이렇게 귀한 생의 요소입니다. 동양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글에 ‘송무백열(松茂栢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나무가 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식물에게도 동정심이 있다 하는 그 뜻일 겁니다. ‘토사호비(兎死狐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는 말입니다. 이 역시 동물계에도 동정심이 있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식물과 동물계에도 이와 같이 동정심이 있거든, 하물며 인간사회에 이 동정심이 결여되면 어찌 인간사회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사실 우리는 누구나 언제 내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평안하나 내일 무슨 불행이 올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실패, 질병, 슬픔, 무슨 고통이 올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남의 사정을 알아 남을 동정할 줄 알 때에 또한 남이 나를 동정해서 나의 고통을 덜어줍니다. 이렇게 동정심은 우리 삶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생의 한 법칙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또한 기억하십시다. 동정심은 신앙과 그 인격의 척도가 됩니다.
신앙과 인격을 헤아려보는 자입니다. 재보는 자입니다. 동정심이 얼마나 깊으며 얼마나 넓으냐 하는 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의 척도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에 있는 흑인들을 동정해서 남북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흑인 노예를 해방하였습니다. 여기에 그 인격이 얼마나 고상한 가가 나타납니다. 슈바이처 같은 이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들의 가련한 생활을 동정해서 고국을 떠나 일생을 아프리카 밀림 가운데서 살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여기에 그의 신앙이 얼마나 돈독한가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그의 동정심은 전인류에게 미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 미칩니다. 전인류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요, 전인류의 슬픔이 그의 슬픔이었습니다.
우리의 동정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 그 심도가 얼마나 깊은가? 우리의 동정심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우리의 인격과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동정심은 다만 외적 불행에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령 속, 그 깊은 곳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만 인간의 외적인 고통에만 동참한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죄악에 묻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심령을 우리가 얼마나 깊은 동정심으로 봅니까?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얼마나 애를 씁니까? 복음을 자유로이 듣지도 못하는 북한 동포들의 심령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애탑니까? 우리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심령들을 위하여 얼마나 민망히 여깁니까? 깊은 동정심이 움직이는 이것은 우리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또 큰 재난이 올 때에 그 사회가 얼마나 상부상조하여 그 상처를 복구하여 주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적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동정심은 또한 한 사회, 한 나라의 문화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불행히 금년 여름에 우리 한국에 큰 수재가 엄습하여 왔습니다. 우리 겨레가 얼마나 자진하여 기쁘게 상부상조하며 그들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 민족, 우리 사회의 문화적 척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솔선수범하여 온 민족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 적십자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 있습니다. 과연 이 회담의 성패여부는 우리 민족의, 특별히 북한 지도자들의 인도적 양심, 곧 동정심의 척도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인도적인 동정심이 좀더 깊었더라면, 가족 분산의 이 참혹한 비극이 20년이 넘도록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입니다. 이제라도 그들의 참된 동정심의 발로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깊이 들으십시다. “즐거워하는 자로 함께 즐거워하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기를 힘을 쓰십시다. 이것도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다른 이들은 다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맏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즐거워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밭에서 돌아오다가 그 말을 듣고 집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힘쓰지 아니하면, 맏아들의 실수를 우리도 반복하기 쉽습니다.
전에부터 내려오는 우리 한국의 속담에 ‘사촌이 밭을 사면 배를 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성공할 때에 같이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사랑이 부족한 데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즐거워하는 자들과 언제나 같이 즐거워하기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픔의 짐, 빈궁의 짐, 질병의 짐, 실패의 짐, 재난의 짐, 고독의 짐을 같이 지도록 힘을 쓰라고 권합니다. 피차의 환난을 돌아보도록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피차에 심방도 좀더 힘써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장례식 같은 때에 할 수 있는 대로 참여하도록 좀더 힘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있던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한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역시 그저 지나갔습니다.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곧 동정심을 발하여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생행로에 강도를 만나 혹은 천재지변을 만나 쓰러진 인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다 이러한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제사장처럼 레위 사람처럼 그저 지나가지 마십시다.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기도하십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우리도 인생행로를 걸어갈 때에 주님의 이 음성에 순종하는 생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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