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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28-40/ 십자가의 그림자 / 한경직 목사 2014-08-25 19:27:19 read : 16972
성경 한 절을 제가 먼저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오늘을 종려주일로 지키고, 또 이 주간을 고난주일로 지키는 때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참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지 아니하리오마는,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더욱 그러합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한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다가 피곤해서 두 팔을 번쩍 들고 기지개를 켜시니, 마침 햇빛이 창문으로 비추어서 그 그림자가 맞은편 벽에 비치게 되니 꼭 십자가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마침 그때에 그 어머니 마리아가 그 방으로 들어오다가 그 십자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십자가는 다만 흉악한 죄인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무서운 형틀이었던 까닭입니다. 다만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또한 의미가 심장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십자가의 그림자로 덮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세례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증언, 곧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도 십자가의 그림자로 덮인 의미 깊은 말씀이올시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4절과 1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십자가의 그림자로 덮인 의미심장한 말씀이올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지키는 종려주일로 시작하여 다음 부활주일로 끝내는 이 고난주간이야말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그림자가 가장 짙은 주간입니다. 이 주간은 복음의 어떤 면보다도 십자가의 깊은 뜻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신령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령의 지도하시는 대로, 그 다함이 없는 그 깊은 뜻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 조용히 신령한 눈을 열어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를 앙망하십시다.
흠 없고 죄 없는, 백옥같이 맑고 깨끗한 그리스도는 그 추한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고, 못 박힌 두 손자국에서는 붉은 피가 흐릅니다. 창에 찔린 그 가슴으로부터는 물과 피가 쏟아집니다. 웬일입니까? 수정같이 맑은 그 심령, 백옥같이 깨끗한 그 마음,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 그 몸이 어떻게 이렇게 추한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이러한 모순, 이러한 비극이 어찌 인간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 역사 위에 나타난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깊은 의미의 일단을 오직 성경에 돌아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께서 나오심을 보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외치셨습니다. 이 어린 양이란 무슨 뜻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은 많은 사람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대속물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느니라” 요한일서 4장에서 말씀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기록하기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도다”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속죄의 제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우리 인간성은 부패하였으며, 그 결과로 우리는 계속하여 또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는 성경에서 선언하는 대로,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느니라” 그대로의 현상인 것입니다.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그 값은 사망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모두 멸망을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그러므로 멸망 받는 이들을 그 자리에 그냥 둘 수도 없습니다. 얼른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저 용서만 하여 주시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용서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올시다.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주를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이 우주의 도덕적 질서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은 다음에 사함을 받기 위하여 어린 양을 대신 드려서 그 피를 흘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를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능히 만민 곧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분을 우리 인간 중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 까닭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아닌 어떤 다른 영적 존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가령 천사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것은 천사는 단순히 인간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해서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인간이면서 죄가 없는 사람이라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곧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 앞에 단번에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 지금 이후로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얻는 길을 열어 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공의를 세우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범죄한 인간에게는 사죄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게 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친히 오래 전에 말씀하신 그대로 “그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 하나하나는 내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얼굴을 신령한 눈으로 앙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는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가공할 일입니다. 빈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와 중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다. 십자가 아래에서 감사를 드리며 오직 할렐루야! 찬송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다시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세요.
깊은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마음의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큰 상처 곧 큰 고통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유를 통하여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어떤 어진 어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그에게 귀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장래에 대하여 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아들이 천만뜻밖에 꿈에도 생각 못하던 큰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 하십시다. 그렇게 되면 그 죄의 결과로 제일 먼저 상처를 입는 이는 누구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그 어머니입니다. 왜요?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죄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어떤 어진 부인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범사에 그를 믿습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 남편은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이 들릴 때 제일 먼저 그 남편의 범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그 아내입니다. 왜요? 그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에게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습니다. 그 상처와 고통은 사랑에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상처는 더 깊고, 사랑이 뜨거울수록 그 고통은 더욱 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의 사랑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와 같은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중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가슴 속에 고통의 십자가가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갈보리산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의 가슴 속에 그 이미 세워진 그 고통의 십자가의 역사적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의 성품과 그의 교훈과 생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의 생활의 절정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깊이 상한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 십자가를 세운다는 이 엄숙한 사실을 언제나 우리 믿는 이들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한 가지 죄를 더 지으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십자가 위에 못을 하나 더 박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하나님께 고통을 더합니다.
그러면 셋째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 줍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 그리스도의 그 간절한 말씀을 우리는 이러한 주간에 또한 들어야 하겠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는 온 인류를 향하여 조용히 무언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이것만이 너희들의 사는 길이요, 축복의 길이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신 그리스도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과연 내 제자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이어받아 사도 베드로는 또 이렇게 권면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과거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가려 줍니다. 덮어 줍니다. 옛날의 허물과 그러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 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좀 배우라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역시 이러한 권면을 이어받아서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내용을 다 기억하시니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계속해서 사랑은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때에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나는 것을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부드럽습니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고, 시기하지 아니한다고 지적합니다.
더 길게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십자가의 권면을 이렇게도 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되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느니라” 왜? 하나님은 사랑이신 까닭이라고.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근본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이날,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서 멀리 푸른 산 갈보리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친히 나무 위에 달려 피를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죄가 하나님의 가슴 속에 세워지는 한 큰 십자가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십자가는 또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가 된 줄 알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사랑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이 주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우리 가슴마다 우리 가정마다 또 우리 교회에 또 우리 사회에 사랑이 충만한 이 계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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