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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16-30/ 살든지 죽든지 /한경직 목사
2014-08-25 14:33:35   read : 12731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20절과 21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그의 사랑하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노사도의 심경, 생활신조, 아니 그의 굳은 결의를 찾아봅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은 이미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다시 놓여 그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다시 만나보기를 물론 원하였으나, 사실은 아무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혹 놓이지 못하고 감방에서 세상을 떠날는지도 모르는 때였습니다.

그러한 환경, 그러한 때에 노 사도는 그의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그의 중심을 열어 보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라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오늘 아침 이 말씀을 잠깐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오늘의 삶을 가지는 우리 모두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여기 기록한 대로 간단히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입니다. 둘째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입니다. 셋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라’는 것입니다.

먼저, 노사도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가지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 부끄러움이 없는 사도,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의 종, 부끄러움이 없는 전도자, 부끄러움이 없는 영혼의 목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원하였습니다. 사실 얼마나 귀한 생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노라고 하지만, 그 삶의 어떤 면에서는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 앞에서 어떤 면에서나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교역자들은 물론 교회의 여러 직분을 맡은 이들 장로, 권사, 집사, 권찰 각 단체 임원들, 각부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들은 특별히 내가 이러한 자리에 있고, 또 여러 가지 교회 봉사를 하나 내 삶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부끄러움이 있지 아니한가, 스스로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 직분만이 아닐 것입니다. 평신도 여러분들도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 삶의 어떤 면에서는 아직도 부끄러움이 없는가, 스스로 성찰하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교역자나, 제직이나, 평신도나, 모두 내 가슴 위에 고요히 손을 얹고,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을 스스로 살펴 부끄러운 면이 있으면 온전히 뉘우쳐 고치고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 국회, 정부, 공무원, 회사 중역과 근로자, 학원의 교수와 학생 등, 또 우리 모두 가정인인데 우리 가정 생활에 있어서도 부끄러운 면이 없는가,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부모가 되십시다. 반면에 자녀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자녀들이 되십시다. 내가 관청에서 일합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공무원이 되십시다. 내가 회사에 있습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중역이 되고 근로자들이 되십시다. 내가 학교에 있습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교육자,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는 학생들이 되십시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선출을 받은 대표자들인데, 부끄러움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되어야 부끄러움이 없는 국회가 되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정부도 그러합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정부가 되도록 같이 노력하십시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교회를 위하여 몸을 바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도록 간절히 바라고 또 노력하였습니다.

둘째는, 노사도 바울은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이 비록 많아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적으로 생각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먼저 은퇴하신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물론 일반 노인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줄 압니다. 말하는 이 사람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전도도 하고, 온갖 봉사도 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학생시대에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무슨 교회나 사회 운동에 동참하지만, 나이 점점 많아지면 그 열심이 식어지기 쉽습니다. 교회 청년들도 그러합니다. 청년시대에 열심히 단체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봉사하고 활동하던 이들이 나이 점점 많아지면 그 이상과 비전과 노력이 점점 식어지기 쉽습니다.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히 일하려는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옛날 갈렙이라는 분은 여호수아와 같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단 두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청년시대에도 담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건너 가나안 복지 변경에까지 갔을 때에, 가나안 복지를 탐지하기 위하여 파송을 받았던 열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열두 사람이 가나안 복지를 답사하고 보고할 때에 다수파인 열 사람은 가나안 복지가 비록 땅은 좋으나 그곳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이 강대하고 성이 튼튼하고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들어가면 그 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민이 다수파의 보고를 채택하고 그 후 40년간을 광야에서 배회한 일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때로는 이렇게 되어서 후퇴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4장을 보면 갈렙이 40년 후에 여호수아에게 와서 하는 말이 성경 말씀 그대로 읽습니다. “오늘날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까지 오히려 강건하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였습니다. 당시 ‘이 산지’는 아낙 자손이라고 하는 아주 거대한 민족이 점령하여 살던, 누구나 침범하기 어려운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갈렙의 소원대로 하라고 그러니까, 이 갈렙이 나이 비록 85세가 되었지만 그 땅을 점령한 이야기가 여호수아 14장에 적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갈렙 같은 이는 전과 같이 이제도 강건한 담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일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본 교회에서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금년에 화보를 발행하여 여러분 다 받아 보신 줄 믿습니다. 그 화보를 보면서 제 마음에는 실로 감격하였습니다. 본 교회가 모두 피난 교우들인데, 당시 그 가난한 교우들이 어떻게 열심히 일을 하였는지 특별히 많은 청년들이 일어나 전도와 봉사뿐 아니라, 온갖 애국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 일한 그 생생한 모습을 화면에서 다시 대할 때에 실로 이 사람은 마음 속에 감격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며드는 한 가지 생각은 40년 전 우리 청년들 그리고 교우들은 이렇게 열심을 내어 봉사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애국운동의 선봉이 되었는데, 오늘의 우리 영락교우들 특별히 청년들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 판단은 여러분이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오늘의 우리도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주님을 위하여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며 싸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비록 나이 많았으나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한 일꾼이 되기를 위하여 힘썼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여기에 클라이맥스가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 하노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노(老)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그분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굳은 결의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한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의 목적이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를 만든 이에게 있습니다. 이 마이크는 피조물입니다. 이 마이크의 존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만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한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목적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대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살아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할 수 있으면 살고,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할 수 있으면 죽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최고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삶의 철학입니까? 또 죽음의 철학입니까?

인간의 최고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 인간의 최고 목표를 알고 사는 이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모든 성자, 모든 순교자, 모든 학자,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살았을 때든지 죽을 때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지상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간절히 바라고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인간 최고의 목표를 위하여 살고 죽는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로 한 주간 전에 시내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인묘지 위에 우리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선교기념관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혹 그 자리에 참여하신 이도 계실 줄 압니다. 앞으로 그 기념관은 서울에 있는 외국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유니온 교회에서 예배처소로 사용하게 됩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준 외국인들에게 조그마한 예배당을 하나 지어드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양화진 묘지에는 초대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구한말에 한국에 와서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애쓰던 이들도 여러 분이 묻혀 있습니다. 약 500기가 됩니다.

살펴보니 그들의 묘비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밀사로 1907년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와 함께 참석한 헐버트 선교사 묘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어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여기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말은 영국에 가면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 정치가나 종교가나 각 방면에 유명한 이들은 모두 이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 장사를 지냅니다. 그 뜻입니다. 자기는 웨스트민스터에 묻히는 것보다 오히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 보통 결의가 아닙니다.

또 유명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묘비에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때 한국은 오늘의 한국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던 어떤 조그만 나라, 미개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왔노라.

켄드릭 씨의 묘비에는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그런 비문이 있습니다. 외국 사람인데,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모든 것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J. D. 언더우드의 묘비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나라에 와서 일하면서도 이런 삶을 가진 것을 나타냅니다.

100년 전,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러 온 하나님의 종들도 문자 그대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문자 그대로 이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사도 바울의 결의와 그의 생활신조를 저희들이 다시 한번 생각하였습니다. 범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한 삶,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일관된 목적을 가진 삶, 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이들이 이러한 결의와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와서 100년 전에서부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봅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와 같은 고귀한 신앙을, 이 유산을 받은 저희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도 이러한 고귀한 신앙의 전통을 잇고도 남음이 있는, 그리해서 이 땅을 온전히 복음화하고 아니 온 동양, 아시아를 복음화할 수 있는 우리 한국 교회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하나 이 고귀한 신앙의 계대자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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