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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14-22/ 은혜, 믿음, 구원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28:57 read : 1140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三․二十)
방금 우리 주님께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 가운데서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책망한 것 몇 가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그들의 신앙이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또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은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부요 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마는 실상은 들여다보면 헐벗고 굶주리고 참혹한 형편에 있는 그 상태를 보시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권면이 있습니다. 열심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二十절에 이와 같이 간절히 권면한 것을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기 는 하지마는 실상은 예수님을 자기 문 밖에 세워두기만 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二장 八절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이렇게 기록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인해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은혜, 믿음, 그 다음에 구원이 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인 요한 계시록 三장 二十절에는 은혜란 말이 물론 없습니다. 거기에 믿음이란 말도, 구원이란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서 은혜와 구원과 믿음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에 세 마디가 있는데 첫 번 말씀은『불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했습니다. 여기 문은 우리 인간의 마음 문을 가리켰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문 밖에 예수 님께서 오셔서 우리 인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보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그 하나님, 전능하신 그 하나님, 영원하신 그 하나님, 그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이것이 은혜올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 곧 축복이올시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에 있는 모든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마는 특별히 이 점이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으려 애쓰는 종교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찾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의 특색입니다. 그리하여 묵상을 통해서, 혹은 고행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혹은 독경, 경전을 읽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세상에 있는 여러 종교들의 특색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런 모든 종교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런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주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말은「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찾으시고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고 하는 이 기쁜 소식이올시다. 온 성경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창세기 三장을 보시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이 범죄 한 후부터는 하나님이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오셔서『아담아, 네가 어디 잇느냐?』하고 찾으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이 진리는 신구약 전 성경구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찾으시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네 친척과 고향을 떠나서 내가 장차 보일 나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찾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먼저 찾아 불러서, 그 민족을 구원하는 큰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실 전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빠진 그 백성을 구속해 내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만방의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힘쓰신 것이 신약의 기록이올시다. 예수 님께서 오셔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교훈이 그러하지마는 특별히 누가복음 十五장에 있는 유명한 비유 셋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여자가 잃은 돈을 찾는 비유, 아버지가 탕자를 환영하는 비유입니다. 잃
은 양이 목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을 우리 에 두고 나가서 산과 들을 헤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잃은 죄인을 찾으시는 모습이올시다. 잃어버린 돈이 여자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잃은 돈을 찾기 위해서 불을 켜고 방을 쓸고 많은 애를 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려고 애쓰시는 모습이올시다. 탕자가 멀리 나타날 때에 벌써 아버지께서 보시고 버선발로 뛰어 나가서 탕자를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을 영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옛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혹은 양심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친구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을 찾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이성, 사고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게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당하는 환경, 경험, 혹은 질병과 슬픔을 통해서, 혹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간단없이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우리를 찾아서 구원하시기를 애쓰십니다.
우리가 알 것은, 누구든지 자기의 마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공경해야 되겠다,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령께서 벌써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우리의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까닭으로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올시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오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십니다.
다음에 하신 말씀『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 마음 문밖에 와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데 누구든지 이 음성을 듣고 양심을 통해서 혹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듣고 문을 연 다음에 우리의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을 여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올시다. 물론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께서 억지로 문을 열려면 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지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올시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아니하고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격이 있다고 하는 말은 자유가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기계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기계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격자입니다.
또 사람은 짐승과도 다르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짐승은 일정한 본능을 주어서 그 본능대로 살면 됩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짐승에게는 도덕이 없습니다. 짐승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본능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능과 함께 양심을 주었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 자유를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것은 나의 할 일입니다. 이 문을 여는 것을 성경의 말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속에서 문을 열고 주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요, 이것이 곧 믿음이올시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인간의「예」라고 하는 대답이올시다.「예」라고 대답하고 문을 여는 것이 믿음이올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로「이터어널 예스」(eternal yes)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영원한 예」라고 하는 대답,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향해서 문을 두드릴 때에『예, 제가 문을 엽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스스로 이「영원한 예」라고 하는 긍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올시다. 내가 이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름을 듣고 내가 문을 엽니다. 문을 여는 것은 내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올시다.
어떤 분은 혹「서렌더」(surrender)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서렌더」를 번역하면「항복한다 」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젊은 사람들에게 별로 그렇게 달갑게 들리지 않을 줄 압니다. 특별히 군인들에게는「항복」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나쁘고, 듣기 싫은 말인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적에게 항복하면 안 되지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는 내 심령이 앞에서 항복을 해야 됩니다. 내 의지를 굴복시켜서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인가의 최대 자유를 뜻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은 인간 누구에게도 구속을 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영원한 예」라는 대답과 마음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나의 의지를 영원히 그 앞에 항복하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올시다.
이와 같이 주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하게 된다면 자연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귀한 손님을 우리가 영접할 때 우리의 방을 깨끗하게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할 때 자연히 죄를 다 고백했습니다. 절반을 팔아서 가난할 사람을 구제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게 될 때에 그 속에 있던 일곱 귀신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죄악이 다 나가고 말았습니다.
어거스틴이 예수를 영접하게 될 때에 자연히 그 생활 속에 허랑 방탕하고 음란한 모든 것이 다 봄 동산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영원한 예」라는 대답을 하고 주님을 내 마음속에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죄를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이렇게 동시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이올시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믿음의 대답이 있을 때에 오는 것이 구원이올시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문을 열라. 내가 그에게고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이렇게 문을 열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잡수시겠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동고동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 얻은 생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 얻은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해서 예수님과 매일 매일 같이 사는 것, 같이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복음 十五장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최후로 말씀하실 때에『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세상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자연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마지막에 승천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하나 하나도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면 물론 하나님 계신 데로 갑니다. 그것은 천당밖에는 다른 데가 몰론 없습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과 동사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얻은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나 혼자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하는 생활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살림을 해도, 장사를 해도, 가르쳐도, 하나님과 같이 합니다.
요새 정치 붐이 일어난 것 같지마는, 정치를 해도 하나님과 같이 해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대학 교수와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대학교수와 대학생간의 관계가 어떠합니까?』고 물으니 그 교수가 얼른『그거야 간단하지요. 그저 지금 대학교수들은 다 글 장사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글 장사, 글을 가르쳐 주고 돈 받고, 학생들은 돈 내고 글 사고, 이렇게 대학교육이 된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이제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지마는 소위 정상배(政商輩)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를 장사하듯 한다고 하는 말인지, 정치를 이익을 내려고 한다는 말인지, 그 뜻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하면 참으로 큰일입니다.『내 지위가 어떻게 될까? 내 권리가 어떻게 될까?』이런 것을 먼저 앞에 두고 정치를 한다고 하면 한국의 장래가 참으로 암담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와 평화와 번영이 있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정치를 하되 하나님과 동사하지 아니하고 나 혼자, 나를 중심으로 피차에 정치를 한다고 하면 이에서 더 큰일이 없습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즉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동사합니다.
바로 어제 저녁에 어떤 분이 공장을 차려 놓았는데『나의 이 공장이 지금 다 돌아가는 중인데 아예 여기서 나오는 것은 온전히 십일조를 내놓고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올시다.
그리고 이것 보세요. 특별히『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잔치를 의미합니다. 사실 구원을 받아서 주님을 마음 가운데 영접하고 사는 사람은, 매일 매일의 심령 상태가 곧 연회를 하는 사람의 형편과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항상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충만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二十三편에『원수 앞에서도 상을 베푸시고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보면『항상 즐거워하라. 주안에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영접해서 주와 동고동락하는 생활은 언제든지 잔치를 베푼 생활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먼저 은혜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주를 영접하여야 됩니다. 주를 영접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주를 모시고 동거하며 동행하며 동락(同樂)하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여러분! 교회에 나온다고 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줄 압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줄 아나 그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주를 문 밖에 세워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 앉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를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합시다.「영원한 예」라고 대답을 하십시다. 이와 같은 축복을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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