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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1:1-10/ 성도의 교제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22:08 read : 1629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一-一-三)
이 요한 一서 一장 一절과 요한 복음 一장 一절은 거의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 一장 一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기 요한 一서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공통된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 "말씀" 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듣고 보고 만진바 된 말씀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소위 그리스도의 가현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 같지마는 사실은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고 하는 그릇된 사상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을 반박하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같은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고 또 우리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귐이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또 요한 一서에 사귐이란 말이 두 번 더 나옵니다. 사귐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교제란 말을 오해하는 이도 있으나 본래는 그렇지 않고 사귄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거룩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먼저 신앙생활이란 위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도 역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一장 六절에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모든 다른 형제와의 사귐도 역시 거룩한 교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신앙생활은 서로간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을 기록할 때에 사도행전 저자는 二장 四十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다 외었지마는 사도신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좀 간략히 번역하면 "성도의 교제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귀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고백이올시다. "성도"라고 하는 말은 물론 우리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온전히 거룩해졌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완전해졌다고 하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선별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뜻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교제라고 하는 성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교제라고 하는 말은 본래 헬라 원어인 코이노니아(koinonia)의 번역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한 가지로 참여한다" 혹은 "공동으로 소유한다" 는 의미입니다. 물론 "사귄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을 읽으면 같은 말이 나오지마는 형편에 따라서 "참여한다" 혹은 "동참한다" "소유한다" "사귐" 그리고 "교제한다"고도 번역을 했습니다. 성도의 교제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九장 二十三절에 "복음에 참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빌레몬 六절에 "믿음의 교제"란 말이 있습니다. 믿음 가운데서 우리 성도는 같이 참여합니다. 빌립보 三장 十절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一장 七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될뿐더러 위로에도 같이 참여하는 자가된다?고 했습니다. 계시록 一장 九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환난과 그 나라와 참는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빌립보 二장 一 절에는 "성령의 교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을 한 가지로 받아서 함께 참여하여 사귄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후서 十三장 十三절에 ?성령의 교통?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령 가운데서 함께 사귄다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 전서 五장 一절에는 "믿는 사람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같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 전서 十장 十六절에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떡을 뗌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고 기록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八장 四절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빌립보 四장 十五절에는 주고받는 일에 참여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신앙과 복음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 모든 성도가 가지는 경험에 한 가지로 참여해서 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피에 참여해서 한 혈통을 받는다는 깊은 뜻을 우리에게 교훈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도의 교제의 깊은 뜻을 두 가지 비유로써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의 비유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떠나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몸과 지체에 비유해서 이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여럿입니다. 이 지체들은 한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체들은 서로 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해서 손이 편안해야 발도 평안하고 손이 아프면 발도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연히 동고동락(同苦同樂)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한 포도나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권면(勸勉)합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제의 깊은 뜻을 생각할 때에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생각하고 힘 쓸 것이 몇 가지 있는 줄 압니다.
우리 교파적으로 생각할 때 합동과 협동을 위해 힘쓰던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라고 여겨집니다. 신조와 교회 정치와 예배 의식이 같다고 하면 이런 교회는 마땅히 힘을 합해서 합동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예수교 장로회니 기독교장로회니 합동 측이니 통합 측이니 하지마는 실상은 그 시조나 정치나 예배 의식이 같습니다. 이렇게 같을 바에는 함께 합하도록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기는 했지마는 신조나 정치 및 예배 의식에 있어서 다소 다른 소위 딴 교파가 있습니다. 이런 교파와의 관계는 공동사업을 위해 협동할 수 있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연합회나 협의회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빌리면 다른 교파와의 관계는 아예 끊어버리고 나서 합하자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성도의 깊은 뜻을 생각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면 같은 교파는 온전히 합동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고 다른 교파와는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협동함으로써 성도의 교제의 깊은 근본 되는 진리를 살리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또 우리 개인적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성도간에 담이 있으면 그것을 헐고 화해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참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성도와의 교제를 끊고 내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만 가지고 살겠다고 하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성도와의 교제를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의 신앙을 피차에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작을 가지고 불을 피워 보면 한 가치로는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셋 혹은 네 가치로 불을 피우면 잘 붙습니다. 신앙의 불도 여럿이 함께 사귀면서 불을 붙일 때 속히 붙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의 약함이 다른 이의 신앙으로 서로 새로워지고 든든하여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염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바울을 핍박하던 이들이 바울을 염병 같은 놈이라고 욕했지마는 사실 참된 신앙은 전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 내가 같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고립적 신앙은 이기적이거나 혹은 독선적인데 오래 가지 못하고 점점 소멸하고 맙니다. 두, 세 사람이 같이 가면 한 사람이 혹 넘어지더라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다른 믿는 사람과 피차 사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경험에 적극 참여하도록 힘서야 합니다.
내 마음 문을 닫아 놓고 혼자 살지 말고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나의 당하는 기쁨과 슬픔을 다른 형제와 서로 나누고 다른 형제가 당하는 기쁨과 슬픔도 내가 같이 나누어서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 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친구가 되도록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 힘을 쓸 것입니다. 어떻든지 다른 사람의 환경과 경험에 동참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려고 하면 가령 어떤 교우가 병중에 있을 때 우리가 그 분을 위문해야 할 것입니다. 슬픈 일을 당한 교우가 있으면 위로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떤 이가 기쁜 일을 당하면 우리도 같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든지 다른 서도들의 경험에 같이 참여해서 동거동락(同居同樂)하도록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 상부상조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신앙 방면에 있어서나 지식 방면에 있어서나 경제 방면에 있어서나 사회 방면에 있어서 피차에 다른 교우들을 도와주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믿음이 약하면 믿음을 도와주어야겠습니다. 지식이 많은 이들은 지식이 적은 이들을 도와드려야겠습니다.
경제력이 있는 이들은 경제력이 없는 이들을 돕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二장에 보면 초대 교회가 은혜를 받은 후에 온전히 유무를 상통하였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은 우리가 상속해야 될 줄 압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여신도 한 분이 믿지 않는 큰 양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의 책임은 양말을 타스로 묶는 일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말이 양말 스무 켜 레 중 한 켤레쯤은 흠이 있어도 괜찮을 테니 섞어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공은 양심이 허락지 않아서 자기 마음의 고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이 어떻게 우리 믿는 이로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여공은 주인에게 가서 자기로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그렇다면 우리 공장을 그만두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만 사면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부터 친구들은 실직한 친구가 다른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생활비를 모두 어서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함께 짐을 지면서 사는 생활을 뜻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모이는 데 힘쓰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배 시는 물론 기도회, 성경공부 혹은 전도회 등에 가입해서 모이는 데 참여하는 것이 서도의 교제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룹활동에 가입해서 얼굴도 익히고 친숙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그룹에서는 교양을 높이는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작은 단체에서는 봉사사업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할 수 있는 대로 그룹 활동에 참여해서 활동할 때 성도의 교제를 두텁게 할 수 있습니
다. 우리가 어느 때에 성도의 교제를 게을리 하리요 마는 특별히 크리스마스 때는 성도의 교제를 할 때인 줄 압니다. 여러 가지 행사와 봉사 및 그룹 활동을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새롭게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구역 예배는 그 구역에 속한 믿는 성도들이 같이 모여서 가정에서 예배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어떠했든 금년은 다 같이 모여서 성탄축하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국에 웨인즈 게일이라고 하는 조그만 고을이 있는데 그 곳에 일찍이 존 호셋이라는 좋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이 곳은 작은 곳이라 교회도 자연히 작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큰 교회에서 이 목사를 초빙하려는 교섭이 왔습니다. 이 때 목사는 초빙을 받고 생각 중에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교인들이 목사를 찾아와서 도저히 떠날 수 없다고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일할 기회와 여러 가지를 보아서는 큰 교회로 가야겠는데 교인들이 안타깝게 진정한 사랑으로 떠나지 말라고 만류함에 호셋 목사는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목사는 일생토록 그 교회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가지 않기로 작정하면서 노래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 노래가 우리 찬송가 四六三장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연락한 사랑이 천당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교제일세."
성도의 교제는 천당의 교제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고 피차에 남을 생각해 주는 천당의 교제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하나 하나가 성도의 교제를 가지기 위해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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