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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24-33/ 십자가 사랑, 하나됨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32:55 read : 1090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十二․二十四)
우리가 어느 때는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특별히 사순절을 당하게 되면 더욱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은 특별히 방금 읽은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자기가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을 어떻게 보셨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서 두 곳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맺느니라.』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로 보셨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그 다음은 三十二절에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십자가에 높이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四절에 보면 주님께서 좀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얘기를 다 아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올 때 한 곳에 가니 불 뱀이 나와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상하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불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끝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뱀에 물린 사람은 장대 끝의 뱀을 바라보고 고침을 받은 역사적 사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자기도 높이 들리게 될 때 많은 사람을 이끌어서 자기에게로 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많은 사람을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력이 있습니다. 끄는 힘이 있습니다.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만유인력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모든 물체는 끄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에는 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월이면 밀물이 많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태양계가 운행되고 우주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태양에 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해서 우리 지구를 비롯해 수성, 금성, 화성 등 모든 유성들이 일정한 궤도를 돌게되고 온 우주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령한 세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인력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끌림을 받아 주님께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인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무성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에도 인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성품에도, 주님의 생활에도, 주님의 교훈에도 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활의 최고봉이 되는 이 십자가에 사람을 끄는 제일 큰 힘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십자가의 인력을 잠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진리를 깨닫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말씀을 처음 듣는 그들에게는 얼마나 깨닫기 어려운 진리였다는 것을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의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부정과 죄의 세력과 싸우시다가 마지막에는 붙잡혀 죽은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가운데도 가장 부끄러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 형틀에 처형한 죄수는 가장 흉악한 죄수, 살인강도와 같은 죄수, 그것도 로마인에게는 그런 형을 내리는 법이 없고, 식민지 백성이나 종이 이런 죄를 지으면, 십자가에 처형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가장 부끄러운 죽임을 당한 이 십자가가 장차 모든 사람을 이끌리라고 하는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마는 깨닫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유대사람에게는 거리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메시야란 유대인의 견지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헬라 사람의 머리로 그 말을 들을 때에 도무지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 처음 전파될 때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이 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는 지도자의 죽음을 전파하는 도이다. 아주 참패한 얘기를 전하는 도이기 때문이다.』으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二장 一절 이하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그 때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파할 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만 전파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십자가의 얘기를 듣고 주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갈라디아 六장 十四절에 이와 같은 글을 썼습니다.『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도 역시 십자가만 전파하였습니다.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의 많은 사람들도 십자가의 얘기만 듣고 주님 앞으로 돌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고, 빌립보 교회가 그러했고, 세계 어떤 교회든지 다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듣고 십자가의 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큰 은혜를 받게 된 계기도 그가 성 다미안 성당에서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고 온전히 그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혹은 모라비안 교회를 창립한 친첸돌프 같은 이가 어떤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님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아서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고 그로부터 유명한 모라비안 교회가 창립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앞에 나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 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유식한 것과 무식한 것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제왕과 종이 다 같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대로 전 세계의 三분의 一되는 인구 즉 十억의 인구가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인력으로써 주님 앞으로 나와서 큰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이런 큰 인력이 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사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는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누가는 누가복음을, 사도 바울은 모든 서신을 쓴 것입니다. 요한 도 서신과 복음서를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서 전체가 이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사실은 너무 놀라운 일이 되어서 우리의 제한된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자간에 여러 이론이 있고 학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진리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호세아 十一장 四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사랑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도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지극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해서 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 四장 十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화목제라고 하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또 로마서 五장 八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해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시며 인간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 모든 부끄러움을 다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 그리 큽니까?
귀중하신 독생자 십자가에 달릴 때
이런 죄인 위하여 참고 견디셨도다.』
또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의 줄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의 줄을 던졌습니다. 생명의 줄을 던졌습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골고다는 바로 우리 인류의 조상이 되는 아담이 죽어서 묻혔던 곳이라고 하는 말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해오는 어떤 성화를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때에 그 아래 묻혔던 아담이 십자가에서 흘리는 보혈로 부활해서 일어나는 그림을 그린 이도 있습니다. 역사적 여부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지마는 그 진리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우리 죄를 대속 함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그 보혈로 씻음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七장에 나타나는 사도 요한의 계시 가운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둘려 서서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때 그 옆에 섰던 어떤 장로가 사도 요한 에게 물읍니다.『이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뇨?』
그 때 사도 요한 이 하는 말이『저는 알지 못합니다만 당신께서 아실 것입니다.』그 때 장로가 설명하는 말이,『이 장로들은 큰 환난 가운데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서 희게 하였으므로, 십자가 구속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영원한 생명 세계에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고, 생명을 주시는 구속과 생명의 줄을 던져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의 줄을 또한 모든 인간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원수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는 그들이 승리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오해였습니다.
죄 없는 그리스도가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자기가 죄인이 되셔서 죽으실 때에 죄도 역시 같이 죽은 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깨졌습니다. 사단의 나라가 패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사랑과 의는 승리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승리의 줄을 모든 사람에게 던져 줍니다.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지마는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로마의 첫 기독교 황제가 된 콘사탄틴이 자기의 대적되는 막센티우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교외에 있는 멜비우스 다리 근처에서 일전이 있게 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싸움이 있기 전날 밤에 그는 환상 가운데서 큰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 깃발 아래서 승리를 거두라고 하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그 환상을 본 후에 콘스탄틴은 곧 십자가 기를 만들어서 그 기를 들고 나가 싸워 크게 승전을 하고 로마의 온전한 황제가 되었고, 황제가 되자 기독교를 핍박하던 것을 금하고 신교 자유령(自由令)을 내린 역사적 사화는 우리가 다 상식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깃발 아래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절망 속에서 헤매는 인간들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으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한동안 온 세상이 캄캄해졌지마는 항상 캄캄한 것은 아닙니다. 한 조각 검은 구름이 빛나는 태양을 한때 가릴 수는 있지마는 아주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정의와 사랑과 진리는 승리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소망의 줄을 던져 주십시다.
한 가지 도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에게 평화와 안식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승리의 생활을 하며 소망을 얻은 사람에게는 그 심령 속에 평화가 깃들이고,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안식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 광야 같은 쓸쓸한 세상에 살지마는, 십자가 아래서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주 예수 십자가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쪼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이 십자가 그늘 아래서 내 쉴 곳 찾았네.』
피곤한 심령이 십자가 아래서 쉴 곳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향하여 사랑의 줄을 던집니다. 구속의 줄을 던집니다. 승리와 소망의 줄을 던집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십니다.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십자가의 사랑의 줄에 끌려서 주님 앞에 가까이 나와 주님께 속하는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그와 같은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면 이 시간 그와 같은 은혜를 받으시기 원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하십시다. 인력이 제일 강한 것은 자석입니다. 강철로 만든 자석에 바늘이 닿으면 거기에 붙습니다. 그 바늘 아래 또 다른 바늘이 닿으면 그것 역시 붙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붙는 것은 그 바늘 자체가 자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가까이 나와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된 생활을 한다면 우리 자체가 하나의 작은 십자가의 인력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이끌어서 주님께로 나오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면 어떤 가정에서 한 분이 처음 나오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분이 달려나옵니다. 그 다른 분은 또 다른 분을 끌어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이와 같이 인력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만일 그 인력이 없다면 내가 과연 그리스도와 확실한 연결이 되었나?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다. 여러 바늘이 다 자석에 붙는다면 서로 가까워집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면 피차에 가까워집니다. 거기에는 자연히 화평이 있습니다. 자연히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우리 사회와 우리 국가를 봉사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인력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하고 십자가의 인력으로 하나로 뭉쳐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 사회와 국가를 봉사하는 한국의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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