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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1-14/ 좁은 문, 생명의 길 / 한경직 목사
2014-08-22 21:39:45   read : 12748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七․十三-十四)

인생은 한 길 가는 나그네올시다. 누구나 매일 매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모래도 갑니다. 한 사람도 그냥 앉아 있는 이는 없습니다. 이 인생의 길에서 쉬는 이는 없습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앞에도 구름 같이 많은 무리가 인생행로를 걸어가고, 우리 뒤에도 수 없는 젊은이들이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길을 걷는 이들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래미야 二十一장 八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걷습니까, 사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신명기(申命記) 三十장 十九절에도『내가 오늘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길, 사망의 길, 축복의 길,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기『좁은 일로 들어가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이 두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 생명의 길이냐, 사망의 길이냐? 오늘 아침 이 시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갈림길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 길의 시작은 어떻게 되며, 어찌하여 하나는 좁은 길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넓은 길이라고 하셨으며,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떠하며, 이 두 실의 종국(終局)이 어떠합니까?

먼저 이 두 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이 두 길의 관문은 하나는 좁고 하나는 넓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좁은 길로 들어가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베들레헴에 가면 그 곳에 예수님께서 나신 곳을 기념해서 주후 四세기에 큰 예배당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있습니다. 돌로 튼튼히 잘 지었고,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성화를 그렸고, 강단 밑에는 바로 예수 님께서 나신 곳이라고 대리석에 별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당의 특색은 들어가는 문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매우 낮으며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까닭으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낮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등에 진 큰짐을 벗어놓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는 여러 사람이 다 함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길을 왜「좁은 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거기에는 다음 네 가지 뜻이 내포된 줄 압니다. 이 말씀은 산상보훈 가운데서 하신 말씀인데 여덟 가지 몫을 받을 사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제일 먼저『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의 제일 첫째 자격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부족을 깨닫고 나의 죄악을 깨달아서, 내가 가진 것이 없는 고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심령이라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야 이 좁은 문을 통과해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겸손할뿐더러 마음속에 애통하는 사람, 자기의 허물과 죄를 원통히 아파하면서 고치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교만, 탐욕, 허영의 죄, 모든 부정한 정욕을 온전히 회개하고 죄의 짐을 벗어놓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는 다른 사람의 덕을 입어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독실하다고 해서 자녀까지 부모를 따라 거저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은 장차 우리가 거쳐야 할 죽음의 문과 같아서 한 사람씩밖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생명의 길에 들어가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좁은 문은「회개의 문」이올시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제일 먼저 외친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가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도 제일 먼저『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의 문은 좁습니다. 겸손해야 들어갑니다. 죄를 애통해야 들어갑니다. 내가 나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때에 나 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회개의 문을 통과하여야 생명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옛날의 열 두 사도도 이 회개의 문을 통과해서 생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남성녀, 성도들이 이 회개의 문을 통과해서야 생명의 길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교훈을 받고 주일학교에 나와서 성경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장성하는 동안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 나와 하나님과 홀로 직면해서 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온전히 회개함이 없이는 생명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의 문은 하나씩 하나씩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좁은 회개의 문을 통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인도하는 그 넓은 길에도 큰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넓고 터서 사실 이 문은 있으나 마나 합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일 필요도 허리를 굽힐 필요도 없습니다. 짐을 벗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짐 진 그대로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넓은 문이올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면 제일 통과하게 쉬운 세관이 홍콩 세관입니다. 어떤 나라에 가면 짐짝을 보는 척이라도 하지만 홍콩에서는 아예 보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홍콩은 문자 그대로 자유항으로서 수출과 수입에 별로 구애를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 넓은 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해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왜 이 생명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고, 사망으로 이르는 길을 넓은 길이라고 하였습니까

첫째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 생활은 일정한 목표가 있는 생활이올시다. 빌립보 三장 十三절과 十四절에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생활입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성품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내 인격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영원 불멸의 생명을 내 생명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간단 없이 이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좁아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일정한 목표가 없는 생활이므로 자연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절제를 의미합니다. 이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데 필요한 일은 하지만 필요치 않은 일은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데 이르기까지 필요를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내 생활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비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와 같은 목표도, 절제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극기를 의미합니다.

나를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간단없는 유혹과 시험이 샘솟듯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도 일어나고 정욕도 일어나고, 허영심도 일어나고 시기도 미움도 이기심도 일어나서 옛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그 시험이 간단없이 우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기는 극기의 생활, 자기와 싸워 이기는 극기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과 싸워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안에서 유혹이 솟아나는 것만 아닙니다. 밖의 세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허영을 통해서 들어오는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욕정, 여러 가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통해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유혹이 밖으로부터 우리를 엄습해 들어옵니다.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많은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보기에는 좁아 보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꼭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남을 구원하고 남을 도와주려고 할 대에는 십자가를 질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이는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보기에는 좁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올시다.

그런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목표가 없습니다. 여기 믿는 사람을 붙잡고『당신이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고 물으면 신앙이 좀 있는 사람은『나는 주를 따라가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삽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 지도 잘 모르고 그저 사는 것을 위해 산다고 대답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법대에 다니는 학생이 제게 와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법과에 입학할 때의 목표는 법학을 잘 연구해서 대통령이 꼭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우리 교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그 목표를 부득이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신앙 생활을 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여러 가지 목표는 있습니다. 가령 정치가, 실업가, 예술가, 음악가, 교육자 등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일시적 목표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가, 실업가, 예술가가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인격을 이루느냐?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너희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불멸의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생의 목표가 없습니다. 생의 목표가 없으니 자연히 그들은「절제」라는 말은 쓰지만 절제의 생활을 하지 아니합니다. 자연히 그들은「극기의 생활」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싸우기는커녕 세상과 야합해서 삽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갑니다.

또 넓은 길로 가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갑니다. 새벽 기도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려고 힘써야 일어납니다. 날이 밝아도 눈을 감고 일어나려고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지는 것입니다.

참말을 할 수 있으려면 내가 꼭 참말을 하겠다고 결심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결심이 없으면 형편에 따라서 거짓말이 잘 나옵니다. 해방 후에 학교를 많이 생겼지만,「절도 전문학교」가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우리 한국 사회에 보면 절도 전문가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절로 됩니다. 넓은 길은 저절로 갑니다. 내가 좁은 길로 가느냐, 넓은 길로 가느냐?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적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많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一세기에도, 二세기에도, 三세기에도, 二十세기에 와서도 그랬고, 유대 나라와 어느 나라에 와서도 그랬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국이라는 나라가 있지만 실상 그 나라에 가보면 사실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은 적은 줄 압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그들의 영향력이 적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제一세기, 제二세기에 보면 신자의 수는 적었지만 장래 로마 제국, 아니 수천 년을 내러오면서 유럽의 역사를 변하게 하고 움직인 이들은 그들이었습니다. 소수였으나 역사를 움직였습니다.

촛불이 아무리 작지만 꺼지지만 않았으면 넓은 방을 비출 수가 있습니다.

소금이 비록 작지만 맛만 잃지 않았다면 많은 식품을 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생명의 길을 가고 빛과 소금이 된다고 하면 금후 한국의 역사를 우리가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종국은 하나는 생명이요, 하나는 사망이올시다. 단순히 천당과 지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참된 성공과 실패를 의미합니다. 불멸의 생명과 영원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앞에는 이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날 입학 기가 되어서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학교에 입학하느냐 못하느냐, 이런 문제로 신경을 날카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청소년 시기에 어떠한 문으로 들어가서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결국 그 청소년들의 일생의 운명을 좌우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중년을 지난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꼭 올바른 길을 택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 하나 하나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르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을 걸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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